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그냥 원하는 수준이 아니라 정말로 미칠 듯이 원한다. 단지 삶의 무게로 인해 '더 불행한 것'을 막기 위해서 '덜 불행한 일'을 하다 보니 자신이 행복을 원한다는 사실을 가끔 까먹기는 한다. 하지만 덜 불행한 일을 하는 것도 일종의 행복이다.
행복하기 위해 쇼핑을 하고, 여행을 하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맛난 것을 먹는다. 친구를 만나고, 놀이공원에 가고, 술을 마시고, 데이트를 한다. 불행을 막기 위해 보험금을 내고, 차 수리를 하고, 일을 하고, 친척들과 만나고, 청소를 하고, 운동을 한다.
행복은 이런 식으로 언제나 어떤 ‘행동들’을 통해서 생겨난다. 가만히 있어서는 얻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어떤 식으로든 움직여야 한다.
모든 움직임엔 돈, 시간, 에너지가 쓰인다. 모두 우리 인간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한정적 자산이다. 소중하게 잘 써야 한다. 하나라도 허투루 쓰면 행복은커녕 불행해지고 만다. 대신 잘 쓰면 좋은 감정들을 얻는다.
쇼핑을 하면 마음에 드는 제품이 생기고, 여행을 하면 추억이 생긴다. 영화를 보면 감동을 얻고, 맛난 것을 먹으면 기분 좋은 포만감을 얻을 수 있다. 친구를 만나면 우정이 생겨나고, 놀이공원에 가면 신나는 재미를 얻을 수 있으며, 술을 마시면 기분 좋음을 얻고, 데이트를 하면 선물, 추억, 감동, 포만감, 사랑, 재미, 기분 좋음을 모두 얻는다. 모두 행복한 일이다. 그러니 행복에 관해서는 데이트가 최고다. 차 수리, 청소, 운동 등은 할 때는 힘들지만 하고 나면 속이 시원하고 기분이 상쾌해진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원래 이렇게나 다양한 것들의 집합을 의미하는 것일까? 마음에 드는 제품, 돌이켜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기억, 다시 봐도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감동, 입가에 남은 달큼한 맛, 속이 시원한 것이 행복인 것일까? 뭐,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의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만족감’이다. 제품을 샀는데 마음에 들지 않으면 행복은커녕 짜증이 난다. 여행을 갔다가 친구와 싸웠다면 추억은커녕 그곳에서 찍은 사진조차 쳐다보기 싫다. 영화를 봤는데 너무 재미가 없으면 욕을 하면서 중간에 나오게 된다. 맛나게 잘 먹고 있다가 반으로 잘린 바퀴벌레의 시체와 아무리 찾아도 그 나머지 반쪽을 발견할 수 없었을 때 끔찍해서 토하게 된다.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충분한 만족감을 얻었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다. 그 만족감이 크면 클수록 더 큰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만족감은 도대체 어떻게 결정이 될까?
그것을 얻기 위해서 투자된 돈, 시간, 에너지(노력)의 총량과 그것을 통해 얻은 결과물의 대비를 통해 이뤄진다. 투자 대비 결과가 적을수록 만족감은 줄고, 투자 대비 결과가 풍족하면 만족감은 커진다.
행복은 결국 돈이나 시간과 같은 ‘한정된 자산’을 쓰거나, 쇼핑을 하는 ‘행동’을 통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결국 그것들을 통해 얻은 것들이 얼마만큼 만족스러우냐에 따른 감정의 총합이다. 당연하다. 우리가 행복하다는 말을 할 때는 ‘기분이 좋다’, ‘기쁘다’, ‘즐겁다’, ‘재미있다’, ‘흥분된다’, ‘평온하다’ 등등의 감정을 느끼는 상태를 표현하지, 돈을 백만 원 썼다, 세 시간 걸렸다,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등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런 일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행복할 것이다’라고 판단을 한다. 결국 이 판단이 사람이 이타적일 수 있다는 커다란 착각을 일으킨다.
우리는 누군가가 돈을 많이 벌었거나, 돈이 이미 많거나, 인기가 많거나, 좋은 직장을 가졌거나, 예쁜 외모를 가진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행복할 것이란' 예상을 한다. 하지만 돈, 인기, 직장, 외모 그 자체가 행복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경우도 있을 정도이다.
그렇다.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거나,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행복 그 자체는 아니다. 그것들을 통해 '만족'이라는 보상을 얻을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다. 행복은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이며, 100% 정신적 활동이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믿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물질적 이득이 아닌 정신적 만족을 얻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의 행동에 있어서 이득과 손해를 결정할 때는 그 사람이 얼마만큼의 정신적 만족을 얻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은 온전히 주관적 감정이라서 그저 내 입장에서 대충 추측만 가능하다. 하지만 그 사람이 투자하고 있는 시간, 돈, 에너지과 같은 한정된 자원들은 얼마만큼 투자하고 있는지 명백히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최신형 스마트폰을 샀다고 했을 때 가격이 얼마인지는 명확히 알 수 있지만, 그 사람이 그 제품에 대해서 얼마큼 만족하고 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단지 내가 좋은 만큼 상대도 좋아할 것이란 추측만 한다.
누군가 여행을 하고 있다고 하면 ‘좋겠다’라고 여기고, 청소를 하고 있다고 하면 ‘안됐다’라고 여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시댁 식구와 함께 여행 중일 수도 있고, 새 집을 구해서 너무도 기분이 좋게 청소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알 수 없는 우리는 돈이 아깝다, 시간이 아깝다, 그 노력이 아깝다, 라는 등의 평가를 하게 된다. 내가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가 어떤 감정들을 느끼는지 알 수는 없으면서도 내가 보기에 영 별로인 것 같다면 상대가 ‘불행할 것이다’라고 결론 내고 만다.
심지어 그 사람이 “나는 충분히 행복해요”, 라는 말을 해도 그 말을 잘 믿지 않으려고 한다. 만약 자신이 같은 자원을 투자했다면 절대로 느낄지 못할 만족감이기 때문에 사람이 그렇게나 많은 돈, 시간, 에너지를 쓸데없이 낭비하고도 행복할 리가 없다고 여기게 된다.
어떤 사람이 매주 요양원에 가서 자신의 돈을 써서 봉사활동을 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 순간에 그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정신적 만족감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대신 그 사람이 주말마다 자신의 소중한 시간과 돈 그리고 에너지를 써서 남을 위해 뭔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로만 인식이 된다. 그러니 그런 행동이 남을 위해서 자신의 손해를 무릅쓰는, 대단히 ‘이타적 행위’로 보일 수밖에 없다.
과연 정말로 그럴까? 아니다. 그 사람은 내 시선이나 혹은 그저 사회 통념상 손해라고 여겨지는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작 본인은 충분히 만족스럽다. 더군다나 그런 삶을 살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평판도 좋아지니까 남을 돕는 일이 충분히 행복하다면 오히려 안 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우리는 그 사람만큼 만족감을 얻을 수 없다. 대신 우리는 영화를 보고, 여행을 떠나는데 돈과 시간을 쓰면 그런 만족감을 얻는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것이 여자 팬티를 모으는 것과 같이 변태적인 것일 수도 있다.
누군가 우리에게 돈을 주면 매우 행복해질 것이다. 돈을 통해서 어떤 것을 사 먹을 수도 있고, 어떤 것을 사서 쓸 수도 있고, 가고 싶었던 여행도 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미 돈이 충분히 많은 상태에서도 그럴까? 그때도 그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아니다. 물질적인 이득은 오직 그 물질이 부족할 때만 한정적으로 행복으로 변환된다. 그것이 물질의 한계이다. 이미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터질 지경인데 누군가 칼국수 한 그릇 더 먹어야 한다고 가져오면 그것이 아무리 맛있어도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이 된다.
이렇듯 행복의 본질은 온전히 정신적인 영역인데 우리는 너무도 오랫동안 물질적 이득을 추구한 탓에, 물질적 손해 여부만 가지고 이타적인지 이기적인지를 결정하려고 한다. 그것도 자신에게는 그렇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대한다. 이것은 오래된 착각이지만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 눈을 떠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