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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우 Jun 21. 2021

너와 나의 간극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꽤나 오래전에 불렸던, 안치환씨의 노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곡이 있다. 이 노래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내 머릿속에는 ‘웬 개소리냐’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은 당시 사람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대인기피증까지 나타나고 있던 나에겐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었던 표현이었다.


그 후로도 꽤나 많은 시간을 그럭저럭 살아왔다. 하지만 나는 점점 고립되고 있었다. 고독이라는 그럴듯한 표현을 쓸 수도 있지만, 자발적 고립이나 고독인 것이고, 나는 그저 외톨이가 되어 있을 뿐이었다.



물론 나도 어느 정도는 자발적이긴 했다. 사람들이 나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람들을 밀어냈으니까. 너는 이래서 별로이고, 너는 저래서 별로였다.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의 긍정적인 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면을 최대한 확대해서 보았다. 그 과정은 당연하게도 사람에 대한 실망이면서도 나에겐 새롭게 생겨난 상처가 되었다.


그렇게 대략 10년 정도 흐른 듯하다. 그 시간 동안 많은 글들을 썼다. 내가 느낀 사람에 대한 실망을 그럴듯한 논리와 적절한 언어로 비판했다. 상처 받고 고립된 내가, 세상에 대해서 하는 말은 늘 비슷했다. 나는 문제가 없었으니 당연히 세상에 문제가 많아야 했다. 실제로 딱히 거짓말도 아니었다. 하루만 신문을 봐도 이 세상은 문제 투성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혼자 밥을 먹다가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내가 그렇게 손가락질하고 있던 세상이 바로 나였였던 것이다. 나는 그동안 거울 속에 비치는 나 자신에게 그렇게 많은 비수들을 꽂아 온 것이다.


우연히 노래의 가사 말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 본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이런 표현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아니, 꽂혔다. 마치 비수처럼.


그랬다. 나는 노랫말처럼 어느 정도까지는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 본 시간들을 보낸 후 내가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이렇게 된 것임을 문득 깨달았다. 과도한 관심이 과도한 기대를 품게 만들고, 그 과도한 기대가 결국 과도한 실망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런 과도한 것들은 처음부터 나로 인해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무엇인가가 되고 싶은, 성취하고 싶은, 올라서고 싶은, 그래서 내가 상상하고 열망하는 어떤 모습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그 모든 것들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때부터 하기 시작한 것들이 바로 비움이다. 쉽지 않았다. 또한 지금도 그리 잘 되고 있지 않다.


어디선가 자신에 대한 객관적 시선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자신의 감정을 깊게 들여다봐야 한다는 조언도 읽었다. 맞는 말이다. 어려웠지만 해보니 조금씩은 되고, 되어감에 따라 내 마음속에 들끓던 세상에 대한 분노는 점점 그 존재감을 잃어갔다.


그런데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그렇게 분노가 사라짐에 따라 그 자리는 비워지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자리에 뭔가가 자동으로 채워지지는 않았다. 그곳은 그저 텅 빈 상태로 공허함만 가득했다. 또 다른 숙제였다. 나는 도대체 그것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그 후로 또 많은 시간이 흐르고 많은 글들이 쓰였다. 결국 내 마지막 결론은, 그 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결국 사람이었다. 예전처럼 실망과 분노의 대상이 아닌, 따뜻함과 충만함으로써 서로를 채워 줄 수 있는, 나와 같은 그런 존재들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달리 ‘나’의 반대말은 ‘너’가 아니었다. 나의 반대말은 ‘너희’였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나' 와 '나 이외의 모든 것들'로 세상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내가 만약 ‘나’라는 틀에서 조금만 벗어날 수 있다면, 그래서 내가 너희 속으로 들어가 ‘우리’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의 온기를 통해 충분히 따뜻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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