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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뻬로까 Mar 18. 2019

산티아고 일지 06 노인들

¿Dónde estoy en este mapa?

12/04/martes

4월 12일 화요일

desde Estella hasta Los Arcos

에스테야에서 로스 아르코스까지

여행한 지 9일, 걸은 지 6일


   오늘 코스엔 '와인 분수'라 불리며 순례객에게 무료로 와인을 제공하는 순례길의 명소, 와인 수도꼭지가 있다. 그곳은 술을 좋아하는 이들과 자유를 즐기는 보헤미안들에겐 천국과도 같은 곳이다. 번갈아 가며 물통을 채울 테지. 나는 숙소 한 쪽 벽면에 마련된 기부금 상자에 동전 몇 개를 넣어두고 기대감에 차서 길을 나섰다. 그런데 웬걸, 신나는 마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무릎이 또 말썽이었다. 구시렁구시렁. 혼잣말로 아픔을 덜어내려 했지만, 이는 나를 더욱 서럽게 만들고 말았다. 이전 마을로 되돌아가 사정을 말하고 하루 더 머물러야 하나? 무릎은 빠르게 악화되었고 나는 맥없이 주저앉았다.


- 으앙, 시작이 이게 뭐야…….

- 너 어디 아프니?


   뒤에서 노부부가 다가왔다. 할머니는 가방에서 알약과 생수를 꺼내어 나의 양손에 쥐어 주었다. 나중에 꼭 약 사서 먹고! 나는 코를 훌쩍이며 알약을 삼켰다. 그리곤 멋쩍어서


- 제 혼잣말도 다 들으셨겠네요. 좀 민망한데, 정말 감사합…….


   나는 내 몸 챙기는 데 정신이 팔려 노부부가 떠나는 것도 몰랐다. 고마움의 표시를 하고 싶은데. 마침 아침부터. 달랑달랑 들고 나왔던 검은 봉지가 보였다. 체력이 바닥나는 것만큼은 막겠다고 가득 채워놓은 나의 간식 꾸러미였다. 이거라도. 뻣뻣한 다리로 속도를 냈지만, 결국 나는 그들을 만날 수 없었다. 대신 붉은색 체크 남방을 허리에 조여 맨 금발의 소녀를 다시 만났다. 매우 단출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본인 팔뚝만 한 바게트를 베어 물며 걸었다.


   나는 그 소녀와 와인 분수에 도착했다. 역시나 순례자 몇은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나는 차례를 기다려 물병에 와인을 채웠다. 잔으로 치면 반의 반 잔 정도. 붉은 음료는 심장을 조금 더 힘차게 뛰게 했다. 그 기운은 어두운 숲을 헤쳐 나가게 했고, 그 끝에선 노란 꽃과의 만남도 기꺼이 허락해주었다. 꽤 오랜 시간을 버텼다. 반면 비는 부슬부슬 그 형태를 유지한 채 계속 내렸는데, 종국엔 나에게서 힘찬 기운의 마지막을 훔쳐가고 말았다. 어깨가 끊어질 것만 같았다. 온통 진흙 길에, 벤치 하나 보이질 않는구나! 두 다리는 관성에 의해 질질 끌려갔다. 큰 산은 벋질러 섰고 안개는 온갖것을 휘감았다. 휘-이. 내 앞에 할아버지 셋은 담소를 나눌 때도 있지만 그다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서로 거리를 두고 걸으며 휘파람을 불곤 할 뿐. 앞 선 이가 노래를 부르면 그다음 사람이 이어 흥얼거렸다.


   비가 그쳤다. 드디어. 나는 방수 커버를 씌운 배낭을 바닥에 벗어던지고 깔고 앉았다. 휴대전화를을 확인했다. 메시지. 집에서 온 메시지였다. 나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판초와 거친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엄마, 나 잘 걷고 있어. 걱정하지 마. 짧은 안부 글과 사진을 찍어 보냈다. 그리고 일어서려는데 뒤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헨리!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누구 말마따나 순서대로 아프더니 지속된 비까지. 오늘 묵을 숙소에 신경 쓸 여력이 없던, 그래서 아무 계획이 없던 나에게 헨리는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갈 거냐고. 별 다른 계획 없어요. (이제 찾아보면 되지 않을까요……?) 그냥 앞에 보이는 곳에 들어가도 되고. 헨리는 그런 내가 걱정이 됐었나 보다. 거듭 같은 질문을 하더니 본인이 가려는 알베르게를 소개했다. 머무르기에 괜찮을 거야. 하지만 조금 비쌀 수도 있어. 아, 여기다! 나는 헨리는 따라 알베르게로 들어갔다. 헨리는 신속하게 접수를 마치고 자신을 따라온 나를 기다리며 혹여 오스피탈레로의 말을 잘못 알아듣지는 않을까 연거푸 설명을 해주었다.


   이곳 알베르게는 침대에 몸을 뉘어 삭신의 피로를 푸는 노인들이 많았다. 그들의 휴식을 방해할까 나는 마을 광장으로 나왔다. 성당 앞에 아이들은 공을 차며 노닐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볼 수 있는 근처 벤치에 앉아 추위를 햇빛으로 달랬다. 헨리는 언제 나왔는지, 성당 앞 식당에 나를 불러 세우더니 미령도 이곳에 왔다고 소식을 전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정말 걱정할 건 없었다. 나는 헨리가 미령의 소식을 전하던 식당에서 미령과 만나 함께 식사를 했다. 그리고 조용히 성당으로 향했다. 저녁 미사를 드렸다.


   모두의 평안을 바라며 끝난 미사 직후엔 순례자들을 위한 시간이 준비되어 있었다. 성직자는 순례자들을 국적에 따라 구분하여 불렀다. 에스파냐, 메히코, 프란시아……. 꼬레아. 오! (España, México, Francia……. Corea. Oh! 스페인, 멕시코, 프랑스……. 한국. 오! ) 모두가 놀라 감탄했다. 그 작은 나라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올 줄은 몰랐을 터. 강단에 서서 각자의 모국어로 적힌 기도문을 나눠주던 신부는 서둘러 여분의 카드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나님, 모두 당신을 따르는 당신의 종들입니다. 긴 순례길 가는 동안 십자가 그늘 아래 우리들을 지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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