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ónde estoy en este mapa?
11/04/lunes
4월 11일 월요일
desde Puente la Reina hasta Estella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에스테야까지
여행한 지 8일, 걸은 지 5일
어젯밤은 유난히 추웠다. 이따금 잠에서 깨기를 반복했고, 몸을 일으켰을 때 눈은 퉁퉁 부어있었다. 눈꺼풀이 뻑뻑하여 으늑한 다리 위 휴식이라도 취한다면 도움이 될 성싶었다. 하지만 오늘의 몰골이 말하듯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나는 자리를 잡거나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기로 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노란 화살표만 집중해 걸었다. 식당이나 슈퍼가 그리워졌을 땐, 비록 그것들을 이미 다 지나쳐 버려 찾으래야 찾을 수 없게 된 후였지만, 오롯이 걸을 수 있었던 꽤 괜찮은 시간이었다.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 사이로 마을을 벗어나자, 탁 트인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찰나의 신선함이 훅 하고 들어왔다. 나무로 수놓아진 푸른 지도가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시끄럽다 하면 그곳에서 항상 제 모습을 보여왔던 셰프는 오늘도 여전히 그의 무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설파하고 있었다. 반면 누군가는 풍경에 취해 저 밑 들판에 앉아 조용한 식사를 누리고 있었다.
12시. 활달한 성격의 식당 주인은 수완이 매우 좋았다. 한국어로 끊임없이 장난치며 손님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다 보니 그의 가게 안에는 한국인들이 많았다. 나는 7유로에 오렌지 주스와 빠에야를 주문했다. 아쉽게도 음식 맛은 주인장의 외국어 실력만큼은 아니었다. 나는 미식을 포기하고 걷는 중에 만난 독일인 친구 키키와의 대화를 위안으로 삼았다. 키키는 커피와 작은 빵 하나로 식사를 대신했다.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그녀는 여유롭고 강인했다. 키키는 어떠한 길에도 개의치 않았고, 뜨거운 더위엔 묵묵히 맞서 걸었다.
나는 그녀의 꾸준함에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키키와 헤어진 후 나는 두 쌍의 부부를 만났다. 한 쌍은 한국인 젊은 부부였고, 한 쌍은 라틴계로 보이는 중년의 부부였다. 젊은 부부는 남편이 다리를 절었고, 중년의 부부는 부인이 다리가 많이 아픈 모양이었다. 이 길에서는 의외로 나이 지긋한 어르신보다 젊은 사람들이 다리를 다쳐 저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한 다리 저는 젊은이에 나도 빠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애석할 뿐이다. 그러고 보면 헨리는 걷는 도중 아늑한 곳을 발견하면 곧장 앉아서 발에 연고를 발랐다. 때마다 나는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물었고, 그럼 헨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다치지 않으려고 바르는 거야.
- 여기서 버스 기다리는 건 아니죠?
- 아직 여기네요. 이따가 또 봐요.
두 쌍의 부부와 나는 어느새 서클을 결성했다. ‘다리 저는 사람들: 우린 절대 포기하지 않아!’
목적지 마을에서 붉은색 체크 남방을 허리에 조여 맨 금발의 소녀를 만났다. 그 소녀도 숙소를 찾고 있었다. 너도 오늘 이 마을에서 머무니? 짧은 대화였지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소녀와 나는 각자 가려하는 숙소가 명확히 있었고, 따로 길을 모색해야 했다. 내 발끝에 망설임이 적다는 건 이제 혼자서 숙소를 찾는 것이 조금씩 수월해지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아뿔싸. 숙소의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옆에 있던 노부부도 꽤나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때 한 남성이 자동차에서 내려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번 달에는 알베르게 문을 닫습니다. 다른 곳을 알아보세요. 부슬부슬 내리던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빨리 다른 숙소를 찾아야 했다. 아무래도 다른 곳을 찾아보심이 좋을 듯합니다. 더 이상의 인원을 수용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음번 찾은 숙소에서도 같은 답이 돌아왔다. 나는 문지방에서 장대비를 간신히 피하며 차선책을 짜냈다. 눈은 답지 않게 방울만 해져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다행히 오스피탈레로는 남은 자리를 찾아냈다. 나는 이곳에서 간신히 뒤에서 두 번째 순례객으로 하루를 묵을 수 있게 되었다. 젖은 신발은 건물 뒤편 신발장에 넣어놓고 침실로 들어가 짐을 풀었다. 알베르게 한쪽에선 기타 연주가 한창이고, 다른 한 편에선 요가로 몸의 피로를 풀다가 점차 건강의 우열을 가리는 경기가 성사되기도 했다. 이곳 오스피탈레로의 이름은 가브리엘, 한국어는 누가 가르쳐줬는지 손자, 손녀,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어서 오세요 정도의 단어들은 적재적소에 구사해내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가브리엘의 유쾌함이 숙소 전체에 퍼진 게 아닌가 싶었다.
비는 계속해서 왔다. 나는 나보다 먼저 가브리엘의 알베르게에 도착해 있던 한국인 커플의 뒤를 따랐다. 끌리는 판초 끝을 한 손에 쥐고, 혼자였다면 엄두도 못 냈을 먼 거리까지 나왔다. 저녁식사를 위해 큰 마트를 찾은 우리는 모든 걸 셋이 나누면 단 5유로에 저녁거리를 마련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셋은 신나서 장바구니에 디저트까지 골라 담았다.
좁은 부엌에서 윤승(한국인 커플 중 남자)이 삼겹살에 칼집을 냈다. 그래야 씹을 때 더 부드럽다며. 유빈(한국인 커플 중 여자)은 한국에서부터 준비해 온 비장의 무기, 볶음 고추장을 꺼내 들었다. 이는 신선한 채소와 쌀밥에 풍미를 더할 것이었다. 식탁에는 접시와 수저가 놓이기 시작하였고 공연장, 체육관이던 숙소는 금세 파티장으로 그 쓸모를 바꾸었다. 유빈, 윤승, 나 말고도 모든 순례자들이 각자의 음식을 만들어 내놓았다. 살룻! 친친! 치얼스! 분위기가 무르익자 각자의 언어로 건배를 외쳤다. 손에 든 와인 잔은 빠르게 비워졌고 또다시 채워졌다. 주둥이가 긴 주전자에 와인을 담아 묘기를 부리 듯 잔을 채워주던 가브리엘은 오늘의 식사가 마음에 들었는지 오스피탈레로로서 간직해온 지식을 총동원하여 풀어냈다. 대략 순례길의 역사에 대한 것이었는데 많은 이들을 듣게 하기 위해 한 보헤미안에게 스페인어에서 영어로 동시통역을 부탁했다. 보헤미안도 분위기에 취해 신나서 통역을 시작했다. 하지만 곧 가브리엘의 말은 통역하기에 어려울 정도로 길고 장대해졌다. 그녀의 머리는 종종 과부하 상태가 되었고, 슬쩍 자리에 앉으려고 때를 기다리곤 했다. 그럴 때면 가브리엘은 꾸준하게 그녀를 붙잡았고 결국 그녀는 끝까지 통역사의 역할을 완수해야 했다. 그래도 가브리엘의 강의는 덕분에 영어와 스페인어로 진행되며 성대하게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