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ónde estoy en este mapa?
10/04/domingo
4월 10일 일요일
desde Pamplona hasta Puente la Reina
팜플로나에서 푸엔테 라 레이나까지
여행한 지 7일, 걸은 지 4일
알베르게 안은 사뭇 조용했다. 6시가 되어 불이 켜지자 부스럭거리는 소리만이 조금씩 들릴 뿐이었다. 아무도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일요일 아침, 여느 날보다 느긋한 출발 분위기였다. 어제 세탁실에 널어 두었던 빨래마저 느긋한 게 함정이라면 함정이었지만. 그래서 나는 준비하는 동안 짬을 내어 빨래를 건조기에 여러 번 돌렸다. 하지만 그 눅눅함은 없어질 생각이 없었다. 별다른 방법이 없어 건조기에서 빨래를 꺼내는데, 옆에 산티아고가 5번째라는 아저씨가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 가방에 매달고 가라고 했다. 그게 바로 산티아고 패션 아닌가요. 행운을 빌어요!
아마도 8시, 팜플로나를 완전히 나가기 전, 공원엔 조깅을 하고 공을 차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할 수 있는 만큼 아침의 태양을 몸에 저장해 두려는 것 같았다. 반면 상점들은 기지개도 켜지 않고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조용하다 못해 고요한 동네에 도달했을 때엔, 여기저기 붙은 피로감과 적당히 따뜻한 햇볕을 벗 삼아 잠깐 벤치에 엉덩이를 붙였다. 오! 굿 모닝. 수비리 알베르게에서 내가 약을 뿌릴 때 기침을 해대던 깍쟁이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이름은 헨리이고, 고향 프랑스에서는 앙리라고 불린다고 처음으로 본인을 소개해주었다. 젠틀하고도 기분 좋은 인사였다. 헨리와 몇 마디 나누고 함께 걸음을 시작하려는 우리에게 그는 본인은 혼자 걷는 걸 좋아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음에 또 만나자고.
우린 미국에서 왔는데, 만나는 사람들마다 기념사진을 찍어서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어. 우리와 사진 한 장 찍겠나? 쌍둥이 같은 외모의 할머니 두 분이 다가와 추억 한 장을 찍어갔다. 고마워, 좋은 여행이 되길 바랄게, 안녕.
- 안녕?
여기저기서 외국인들이 한국어로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오후에는 비가 올 거라는 예보를 남기고 떠난 호주 청년 팀을 필두로, 바람에 휘청거리고 풀린 다리에 휘청거리는 순례객들이 뒤를 이었다. 한데 이 곳 주민들은 벌써부터 정상을 찍고 반대편 우리를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바람이 그들을 밀어 주기나 하는 것처럼.
나는 작은 교회로 들어갔다. 교회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글을 쓰는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여행 후 맞는 첫 번째 일요일을 기념하며 그 작은 교회 안에서 홀로 기도했던 기억이 있다. 무거운 배낭에 짓눌린 어깨와 허리, 불이라도 난 듯 뜨거워진 발바닥, 여기저기 멍든 발목 그리고 어두운 예배당. 또 엄청 울고 말았었다……. 걸은 지 고작 나흘, 민망해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건 눈과 훌쩍이는 코는 어쩔 수 없다 샘 치고.) 다시 밖에서 맞는 바람은 무척 시원했다. 너른 들에 끝없이 펼쳐진 유채꽃은 춤을 추고 풍차는 유유히 날개를 돌려 댔다.
용서의 언덕은 용서의 수단으로 바람을 사용하는 모양이다. 깊숙이 꿍쳐 놓았던 찌든 마음뿐만 아니라, 검은 순례자들과 사진을 찍으려고 내려놓은 배낭과 스틱, 모자, 장갑, 물병 등등 모든 걸 날려버릴 기세였다. 그러다 보니 바람으로부터 각자 자신을 지켜야만 했다. 우리의 짐들은 십자가 비석에 옹기종기 모아져 서로를 붙듦으로써, 젊은 순례자들은 검은 순례자들 사이에서 가장 밝은 표정과 가장 큰 동작을 취함으로써, 느지막이 언덕에 도착한 헨리는 그런 그들과 모아 놓은 짐들을 바라보며 빙긋 웃음을 지음으로써 본인의 자리를 지켰다. 절벽으로 떨어지는 바람, 나의 팔다리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바람에 찌든 때를 털어 버리고 나니, 내리막길에 선 나의 무릎엔 윤활유가 없었다. 바닥의 자른 돌들에도 덜컥거렸다. 스틱에 의지하여 게걸음으로 경사를 내디뎠다. 줄곧 시야에서 보이고 안 보이고를 반복하던 헨리는 갈림길 중 편한 길을 알려주었다.
와그작, 와그작. 기내식으로 나왔던 과자도 언젠간 귀중히 쓰일 것이라 생각하고 쟁여 두었는데 드디어 쓸모를 보였다. 짭짤한 과자를 한 봉 털어내고 "내달리 듯" 걸어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그리 이른 오전도 아니건만 시에스타에 걸려 눈 씻고 찾아봐도 사람은 보이지 않는 와중에 가까스로 꼬부랑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그리고 빠르게 물었다. 돈 데 에스따 아쎄오 오 세르비치오? 어, 그것도 아니면……. 바뇨? (¿Dónde está el aseo o servicio? O……. baño?) 그렇다. 내가 내달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화장실이었다. 그러나 내 발음이 형편없었는지 한참을 서로 통하지 않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고 나서 할머니는 공사장인지 주차장인지 하는 곳, 유리창도 깨지고 무시무시한 그런 곳을 알려주었다. 여긴 할머니네 집인가? 나중에 돈을 내라는 건 아닐까? 확인하고픈 것들이 가득했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 쏴아아. 나는 쭈뼛대며 화장실을 나왔다. 감사합니다. 이번엔 별 일 아니라는 뜻이었을까, 밖에서 기다리던 할머니는 또 알 수 없는 스페인어를 왕창 쏟아내고 성당으로 사라지셨다. 급한 불을 끄고 나니 다시금 걸음 속도를 낮출 수 있었다. 더불어 고조되었던 긴장감은 와르르 무너졌다. 도로에 배낭을 깔고 철퍼덕 대자로 누웠다.
미령은 더 이상 못 걷겠다고 했다. 당장 여기도 나쁘지 않으니 이곳의 숙소를 알아보겠다고 했다. 나는 홀로 본래 목적지인 다음 마을까지 걸었다.
생각보다 빨리, 언젠가 인터넷에서 봤던 알베르게 하나가 눈 앞에 나타났다. 혼자서 숙소를 정하는 것은 처음인 터라 더욱 신중하게 되었다. 괜히 한 번쯤은 그냥 지나쳐야 할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 본 다음 표지판 앞에서도 오랜 시간 망설이고 있는데, 숙소 안에서 한 한국인이 인사를 건넸다. 들어오세요! 여기 한국사람도 많아요.
아 힘이 다 빠지는군. 샤워부스 안에서 생애 처음으로 복근이라는 것이 자리 잡으려 하는 것 같아 잠깐 엔도르핀이란 게 돌았으나, 곧이어 피를 보고 말았다. 생리를 시작한 것이다. 한국에서처럼 많이 아플까? 내가 약을 가져왔던가? 2층 침대에 올라가 앉아 잡생각을 해댔다. 그때 밖에서 들어오는 한국인 커플이 보였다. 혼자가 되어 축 처진 거라 생각했는지 한국인 커플은 부단히 나의 기분을 풀어주려 노력했다. 그들은 함께 동네 슈퍼에서 장을 보고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다. 나는 부엌에 기름기가 남아 미끌대는 식기를 그마저도 깨끗해 보이지 않는 수세미로 닦았다. 팬도 불도 모자라는 가운데 동선이 꼬이지 않게 서로 피해 다니며. 요리가 하나 둘 만들어졌다.
- 저녁 식사에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냄비에 한 가득 내온 음식은 우울한 저녁에 훌륭한 식사가 되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