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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뻬로까 Mar 31. 2019

산티아고 일지 15 폴짝

¿Dónde estoy en este mapa?

21/04/jueves

4월 21일 목요일

desde Hornillos del Camino hasta Castrojeriz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에서 카스트로헤리즈까지

여행한 지 18일, 걸은 지 15일



   무심히 바나나를 베어 물다 토스터기 옆에 쓰인 글씨를 발견했다.


- (아침은 기부금을 받고 제공해 드립니다.)


   감사한 식사를 하는데, 항상 현란한 야광 빛깔의 옷을 입는 까만 피부의 외국인이 자신의 카메라가 없어졌다면서 식당에 모인 순례자들에게 도움을 청해왔다. 다들 당황스러워했지만 자신의 주위부터 찬찬히 살폈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진이 다 들어 있는데……! 찾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녀는 울먹이기 시작했고, 위층과 아래층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발을 굴렀다. 그리고 자신의 소중한 카메라를 찾아달라고 더 간곡히 호소했다. 그때 한 아저씨가 갸우뚱하며 그녀의 가방을 위로 들어 올리는데, 의자 아래로 작은 카메라가 툭! 하고 떨어졌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길을 미끄럽게 만들었다. 한 발을 뗄 때마다 다리를 무릎까지 번쩍 올리고 질지 않은 바닥을 골라 밟아갔다. 그리고 도통 물을 피할 길이 없으면, 스틱은 물구덩이에 박은 채 주변에 심어진 얄따란 나뭇가지를 움켜쥐고 비스듬히 길을 뛰어넘었다. 그러다 쿵! 함께 가던 한국인 아줌마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가지고 있던 휴지를 몽땅 꺼내어 진흙을 닦아냈다. 괜찮으세요? 걱정을 하며 옆을 지나는 유빈도 오늘은 많이 지쳐 보였다. 그래도 유빈이 아픈 만큼 윤승의 배낭이 커져있었다.

   진흙 길을 벗어나자 카페가 보였다. 모든 순례자들이 카페 앞에서 젖은 머리와 판초의 물기를 털어내고 신발에 진창 묻은 진흙 때문에 엉거주춤했다. 그래서 따뜻한 카페는 더욱 귀한 요새이다.


   한 수도원 터 앞에, 봉고차를 세워두고 세요를 찍어주겠다는 어느 할아버지가 있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내 크레덴시알에 세요를 찍고는 조심스레 차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목걸이와 팔찌 등 십자가가 달린 각종 액세서리가 걸린 판자였다.


- 미안하지만 내 배낭은 이미 충분히 무거워요.


   나는 정중히 구매를 거절하고 걸음을 유지했다.


   얼마 가지 않아 언덕 위에 성이 보이는 작은 마을 초입, 한국인 아줌마의 일행과 팀을 만났다. 아줌마는 일행을 모두 만났으니 봐 두었던 숙소로 가겠다며 팀과 나에게 인사했다. 그래서 나는 팀과 함께 낮고 꾸준한 마을의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며 알베르게를 찾아 나섰고, 거의 꼭대기에서 하나를 발견했다.


- 저희 알베르게는 순례객들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한답니다!


   순례자들의 굳은 발바닥, 뭉친 근육을 위한 무료 마사지도 있었는데, 그 사실을 들은 팀은 근래 가장 신난 표정을 한 채 숙소로 들어갔다. 샤워를 마친 나는 오늘 흙탕물에 엉망이 된 옷가지들을 빨았다. 비누도 넉넉지 않아 물로만 꿀쩍거렸는데, 수동 건조기에 넣고 직접 물기를 빼내는 것이 꽤나 후련한 느낌이었다. 돌돌돌돌……. 하물며 날씨는 화창하고 빨랫줄에 걸린 옷들이 바람에 나부꼈다. 오늘따라 심히 고생한 신발도 좀 씻어내야 할 텐데. 나는 쉼 없이 바로 등산화를 대야에 넣고 벅벅 씻어냈다. 흙탕물이 도로 내게 튀는데도 그게 또 마음을 설레게 했다. 또 다른 거! 신나는 거!

   마을 중심으로 나가보니 한 순례객이 야외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거의 빈 접시였다. 나는 남은 빵 조각에 눈짓하며 물었다.


- 여기 맛있나요?

- 여기 튜나가 맛있어!


   나는 식당에 들어가 추천 메뉴인 참치 빵과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다.


   배부르고 따듯하니 졸음이 몰려왔다. 알베르게의 터줏대감 강아지 니고도 바닥에 배를 깔고 휴식 중이었다. 나도 잠시 눈을 감고 햇볕을 즐겼다. 한편 마사지를 끝낸 팀은 이후 상기된 얼굴로 친구들(느지막이 유빈과 윤승도 도착했다.)에게 따뜻한 코코아를 대접했다. 팀의 코코아를 받은 이들은 카탈루냐 출신의 사내 둘에게 카탈루냐어를 배우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인 커플은 새로운 이야깃거리에 흥이 올랐는지 바로 와인 한 병을 구해와선 식전주를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다 윤승이 마을의 성으로 올라가는 길을 알고 있다며 등정을 추진했다. 아까부터 성이 눈에 밟혔던 나는 그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샌들을 신고 올라가다 보니 또렷이 느껴졌다. 풀들이 발가락 사이를 간질였다. 그래서 나는 뜨거운 하늘에 뜬 무지개를 향해 성큼 뛰어올랐다. 그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니 지붕이며 골목길이며 무지개의 일곱 가지 색과 뒤섞여 눈이 부셨다. 모두 데려오지 못한 것이 아쉬워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 모두와의 저녁 약속을 위해 내려가기를 서둘렀다. 그렇게 아스라한 외길에서 두 팔 벌려 균형을 맞추며 숙소로 내달렸음에도 도착한 마을은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순례자 메뉴는 다음 날을 위해 한 사람이 먹기에 버거울 정도로 양도 많고 기름질 때가 있다. 새로운 친구들과도 함께 한 오늘의 저녁이 딱 그랬다. 열량도 얻었겠다,


- 내일의 목적지 프로미스타를 힘껏 외쳐보자!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숙소는 소등할 시간이 이미 지나있었다.


- 쉿!


   우리는 발과 쭉 뻗은 손의 감각을 의지하여 숙소를 머릿속으로 얼추 그려냈다. 그리고 무거운 배를 하고는 마지막까지 까치발을 들고 고요한 방 안, 각자의 침대로 향했다.


instagram.com/lupe.lo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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