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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뻬로까 Apr 03. 2019

산티아고 일지 17 악몽을 꿨어

¿Dónde estoy en este mapa?

23/04/sábado

4월 23일 토요일

desde Frómista hasta Carrión de los Condes

프로미스타에서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까지

여행한 지 20일, 걸은 지 17일



   굿모닝! 유빈과 윤승에게 어제 저녁에 먹다 남은 것이 있으니 그걸로 아침을 대신하자고 제안했다. 팀과 같이 산 것인데, 아까 아침 인사를 한 뒤론 팀이 도통 보이질 않네요. 그러자 유빈은 새벽같이 일어나 여기서 빨리 벗어날 것이라는 엊저녁 팀의 다짐을 나에게 전해 주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좋은 인상을 얻진 못했나 보다. 나도 그랬던 것이 출발한 길에 안개는 자욱한데 프로미스타를 나가는 표지판을 보곤 마음이 후련했었다. 그리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대번에 힘이 났더랬지.

   나는 다리 위, 순례자 조형물의 가슴팍에 난 구멍으로 풍경을 엿보았다. 이렇게 본 순례길은 내가 등에 지고 있는 것과 마음에 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스치듯 일깨워줬다. 나는 두 손으론 배낭의 어깨 끈을 쥐고 고개는 앞으로 쑥 내민 채 길을 걸었다. 오전이라 길은 한산했다. 그래서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벤치에 힘없이 앉아있는 팀이 뚜렷이 보였다.


- 왜 여기 있어?

- 다리가 아파.


   나는 배낭에서 그동안 수집해온 연고와 알약을 꺼냈다.


- 다리가 아파서 택시를 불렀어.


   팀은 도저히 걸을 수 없어 택시를 불렀고, 택시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 너도 여기 있다가 택시 타고 같이 가지 않을래? (택시 Taxi, 대게 부상이나 체력 부족 등의 개인적인 사유로 활용된다. 단 100km를 남긴 시점부터는 택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는데 이는 상당 거리를 세요 없이 지나치게 되어 순례 여정이 인정되지 않아 순례 증서를 발급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택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방법이었다. 다리가 아프다는데 혼자 둬도 될까? 걷고 싶었다. 하지만 많이 우울해 보이는데. 등에 진 것을 쉽게 내리고 싶지 않았다. 두 다리로 모든 길을 지나고 싶었다.


- 미안하지만 난 걸어가고 싶어. 먼저 갈게, 조심해서 와!


   내가 선 곳에서 길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팀도 그랬나 보다. 우리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 다시 올라섰다.


   기적이 일어난 성당이 있다는데, 기적이라……. 으악! 기적의 성당을 지나면서 나는 벌레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매일같이 씻는데 왜 자꾸 달라붙는 거야? 날아다니는 벌레들에 팔을 휘저으며 우는 소리를 하는데 어떤 아저씨 둘이 호두와 크렌베리가 담긴 봉투를 내밀었다. 오독오독. 나는 조용히 입을 닫고 오물거렸다.


   카리온에서 보이는 첫 번째 알베르게에서 접수를 마치고 샤워를 하니 몸이 노곤했다. 그러나 숙소에 붙박여 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잽싸게 밖으로 나갔는데, 비는 오고 날씨가 제법 추웠다. 그럼 젖은 머리라도 말리고 갈까? 숨겨진 장소에서 열쇠를 꺼내어 열쇠 구멍을 돌리면! ……. 또? (나는 며칠 전 부르고스 숙소의 테라스에 갇혔던 적이 있다.) 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분명 오스피탈레로가 알려준 대로 했는데. 열쇠를 끼었다 빼기만 여러 번, 오래된 문이 상하기라도 할까 세게 밀치지도 못했다. 벽으로 사방 막힌 이곳은 조용하고, 나는 비 내리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깐 혼자서 명상의 시간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지. 벌벌 떨리는 몸만 어찌할 수 있다면.

   나는 한참을 기다린 뒤에야 어느 무리에 섞여 추위를 피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건조기에 두 번 이상 돌려도 막 빨래를 마친 것 마냥 옷가지들이 축 늘어져서 마당에 널어놓고 나간 것이었는데, 내일도 땀으로 적셔질 본인 처지를 아는지 옷가지들이 자꾸 비를 불렀다. 나는 서둘러 옷을 걷어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혼자 쓰는 8인실에서 물기 먹은 옷들을 의자 위에 펼쳐 놓았다.


   시에스타가 끝날 무렵인 오후 4시 반, 다시 밖으로 나와 유모차 부대의 도움으로 찾게 된 약국. 어린 소녀 한 명이 나를 관찰했다. 그 소녀는 늙은 약사가 나의 증상에 맞는 약들을 꺼내 주는 동안, 벽 뒤에 서서 경계와 호기심 사이의 눈망울을 반짝였다. 서툰 스페인어와 이를 메우기 위해 실컷 과장된 표정 또는 몸짓에 관심이 갔던 모양이었다. 물집 난 발에 붙일 밴드와 발목보호대를 사서 약국을 나설 때, 아이는 밖으로 나와 수줍게 인사했다. 


- 아디오스. (Adios.)


   작별인사를 했지만 만남은 그리 멀지 않았다. 마을 중앙에 난 도로, 그 중심에 선 순례자 동상을 멋있게 찍어보겠다고 한참을 서성이며 촬영에 열정을 불태우는 순간, 유빈과 윤승, 팀을 만났다. 그들은 마을에 들어오면서 보았던 큰 마트로 가고 있다고 했다. 인당 5유로만으로 최고의 파스타를 만들어 먹겠다는 포부였다. 셋은 기세 등등한 표정으로 넌 뭘 샀냐고 물었다. 나는 토요일이라는 이유로 가게들이 모두 일찍 닫아서 슈퍼 찾기를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와중에 막 문을 여는 곳을 발견했었다. 그곳은 슈퍼보단 과자점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동네 문방구에서 파는 군것질 거리, 불량식품들이 가판대를 가득 채웠기 때문이었다. 손에 든 가벼운 비닐봉지엔 빵과 주스, 바나나 그리고 요플레가 들었다. 그거 가지고 되겠어? 그들은 장난스레 코웃음을 쳤다. 그럼 뭐 얼마나 다를까. 큰 마트라니까……. 따라 가볼까?


   토요일이라니까! 덩치 큰 건물은 셔터를 내리고 굳게 닫혀 있었다. 다시 마을 광장으로 향했다. 다시 시장 안을 찾아봐야 했다. 할아버지! 오늘 가게들은 다 닫나요? 흰 가운을 입고 초록색 철문을 비집고 나오던 할아버지는,


- 아니 다 닫지는 않았을 텐데, 내가 찾아봐 줄게.


   가운 주머니에 물감과 붓을 넣어 가지고 있었다.


- 할아버지, 그림 그리세요?

- 오, 그림에 관심이 있나? 들어와 봐! 내 작품들을 소개하지.


   할아버지는 자랑스레 자신의 작업실을 소개했다. 나는 그림도 그리고 조각도 만들지. 할아버지가 스페인어로 설명하는 것들을 손동작과 표정으로 유추해냈다. 아마도 마지막에 보여준 초상화는 할아버지의 부인과 아들딸이었으리라. 색다른 만남에 순례자 넷과 마을 예술가는 모두 신이 났지만, 이야기는 다시 본론으로. 예술가 할아버지는 밖으로 나와서 주변 사람들에게 지금 연 마트가 있는지 직접 물어봐 주었다.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미니 슈퍼가 있을 거야. 내가 갔었던 과자점이었다. 오늘의 저녁을 위해 신중히 장을 봤다. 토마토 소스를 베이스로 한 파스타와 와인. 소스만 쓰면 섭섭하니 싱싱한 진짜 토마토도 하나 골라 넣었다. 그리고 바게트는 남지 않게 반으로 잘라냈다.

   유빈, 윤승, 팀이 묵는 알베르게로 갔다. 고맙게도 그들은 나를 그들의 저녁식사에 초대해주었다. 큰 부엌에는 우리 넷 뿐이었다. 요리에 필요한 도구들을 찾아 선반과 서랍을 뒤적였다. 제법 할 일을 분담하자 구색을 갖춘 평범한 주방이 되었다. 그러다 재료가 모자라면 객식구(나)는 슈퍼로 달렸다. 아까 잘라냈던 바게트 반 쪽을 데리고 돌아와야 했다. 그 사이 테이블은 조금씩 격식을 갖춰갔고, 마침내 정성껏 만든 파스타는 뜨거운 김을 내뿜으며 프라이팬채로 식탁 위에 올랐다.


   따뜻한 식사를 한 후 돌아온 숙소, 살짝은 낮은 천장과 그리 밝지 않은 조명의 방에서, 빨래는 여전히 물기가 축축해 있다. 오후에 사람이 하나둘씩 더 오더니 지금은 나까지 총 4명이 자리를 잡았다. 한데 지금 나는 구석 자리 침대 속에 푹 꺼져있다. 꿈인지 상상인지 눈을 감으면 무서운 이미지가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저 그런 느낌이 들어 몸에 힘이 없다. 침낭을 머리 끝까지 끌어올리고 다급히 성경을 찾았다. 감기인가? 내일은 코스의 절반만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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