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뻬로까 Apr 05. 2019

산티아고 일지 18 순간이동은 존재하지 않아

¿Dónde estoy en este mapa?

24/04/domingo

4월 24일 일요일

desde Carrión de los Condes hasta Terradillos de los Templarios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에서 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까지

여행한 지 21일, 걸은 지 18일



   분명 화살표를 따라 걸었는데, 그 끝은 골목 안 어느 건물을 가리켰다. 알베르게로 가는 길이었구나. 순례객들의 배웅을 마치고 문설주에 기대 선 수녀가 나의 방향을 바로잡아 주었다. 그러나 나는 종종 길을 잃어버렸다.

   강의 수면이 낮고 곳곳에 나무 뿌리가 보이는 것이 청아하면서도 늪지대처럼 보였다. 그 맑은 늪을 바라보며 나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걸었다. 그렇게 다리 끝에 다다랐다. 외벽이 얼룩덜룩한 것이 세워진 지 오래돼 보이는 성당을, 순례길이 여러 차례라던 할아버지 둘이 고개를 젖혀 바라보고 있었다. 올라, 부엔 카미노. (Hola, buen camino.)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오늘의 길을 응원했다. 나는 다시 도로가를 걸었다. 순례자 동상, 순례자 병원. 베이스 캠프를 두지 않고 여행하는 순례자들에게 힘이 되는 것들이 많았다.


   아침부터 브래드와 그의 친구들과 자주 마주쳤다. 어제도 와인을 즐기며 느지막이 출발했을 텐데, 그들은 에너지가 넘쳤다. 힘이 빠져 덜렁대며 걷는 나로서는 마주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해서 잰걸음으로 그 상황을 빠져나갔다.

   길은 슬슬 가이드북이 알려준 대로 변해갔다. 어딜 둘러봐도 풍경은 똑같고 그림자 한 점이 없었다. 이따금 사진을 찍어보려고도 했으나 뙤약볕의 뜨거운 열기나 화려한 색은 담기지 않았다. 덩달아 기분도 쉽게 바뀌질 않았다. 그러나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될 길이기에 사진을 찍기 위하여 나는 멈춰 서기를 반복했다.


- 내가 널 찍어 줄게.


   박물관에서 만났던 할아버지가 사진에 나를 담아주겠다고 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미소를 지었다.


- 괜찮나?

- 멋진 사진이네요! 고마워요.


   오랜만에 마주한 나의 모습이었다. 나는 위에 지붕을 댄 쉼터에 앉아 메마른 나를 한 번 더 관찰했다. 괜히 젤리와 과자로 마음을 달랬다. 그리고는 여태 가지고 다녔던 바나나 껍질에서 손을 떼어내고, 근처 벤치에 배낭을 풀고 있는 브래드 친구들과 어색한 인사를 했다. 다시 걸어 볼까. 내 그림자는 조금 더 짧아져 있었다. 하늘엔 큼직하게 떼어낸 구름 조각들이 부유하고 땅엔 들판이 펼쳐졌다. 챙을 뒤로 넘겨 모자를 쓴 금발의 남자와 그의 아버지는 서로의 리듬에 맞추어 길을 걸었다. 그러면 들판은 홍해가 갈리듯 양 편으로 갈라졌다. 왼쪽은 붉은빛의 토양으로, 오른쪽은 푸른 풀밭으로 모습을 달리해 보였다.


   오늘 하루 동안 지나는 나그네가 이용객의 전부일 것 같은 가게. 나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긴 바케트 안에 계란을 넣은 보까디요와 시원한 오렌지 주스 한 잔으로 기운을 차려볼까 했다. 눈을 감고 식전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쩍 하고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이번엔 오렌지 주스 한 잔. 어떻게 걸었는지 기억조차 없는데 나는 또 다른 카페에 앉아 있었다.


- 목만 축이고 금방 일어나야겠다.


   그때 한 할아버지가 스페인어로 무언가를 장황하게 설명하더니 나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마을이 표시된 순례길 지도였다. 지금 난……. 여기 있구나. 손가락으로 나의 위치를 짚어냈다. 나는 이 길의 반을 걸었다.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오늘만큼은 내가 나를 푸짐하게 대접하면 어떨까. 그래서 숙소에 있는 것이었지만 외부 레스토랑처럼 화려하게 꾸며진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주문을 하고 홀 중앙에 자리를 잡았는데, 홀은 순례자들의 대화로 웅성거렸다. 감기 기운에 입맛이 떨어진 상태였고 마음은 싱숭생숭했다. 때마침 통유리에 석양이 비추더니, 나는 생각에 잠겼다.


- 오, 손톱이 많이 길었네?


   식사를 마치고 복도에서 지저분한 손톱을 잘라냈다. 그리고 다시 밖이 보이는 곳에 앉았다. 내 옆에 앉은 남자는 전화기를 붙들고 오래도록 통화를 했다. 그런데 소음처럼 들리는 이야기 가운데 반복되는 단어 하나가 귀에 들렸다. 따 봉. (Tá bom.) 미뤄 짐작하건대 당신의 여행이 잘 진척되고 있나 보군요. 내일은 얼마나 걸을까? 어디서 묵게 될까? 나는 계획을 세우고 자료를 모았다.


instagram.com/lupe.loca

매거진의 이전글 산티아고 일지 17 악몽을 꿨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