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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뻬로까 Apr 08. 2019

산티아고 일지 19 얼굴 마주하기

¿Dónde estoy en este mapa?

25/04/lunes

4월 25일 월요일

desde Terradillos de los Templarios hasta Sahagún

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에서 사아군까지

여행한 지 22일, 걸은 지 19일



   아프다는 이유로 걷기를 멈춘다면, ‘에라 모르겠다!’ 이 길을 아예 그만둘지도 모를 일이었다. 짧은 거리라도 계속 걸어야지. 그래서 일찍 사아군에 도착하면 오후 내내 푹 쉬어야지! 했는데 이미 녹초가 되어버린 몸은 느지막이 잠에서 깼다. 그나마도 여기 있는 한국인 남자 세 명의 요란한 알람 소리 덕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늘만은 충분히 먹고 맘껏 쉬며 걷자. 나는 일정에 약간의 변화를 주었다. 감사하게도 시작은 자박자박한 흙 길이었고, 바닥에 콕 박히는 스틱은 감기 기운으로 으슬으슬대는 몸에 큰 도움이 되었다.

   첫 번째 마을에서 코코아 한 잔을 시켰다. 그리고 살짝 고민을 했다. 사치 아닌 사치를 부려볼까. 특별히 초코바 하나 더 사자. 걸을 때 힘들면 꺼내 먹을 것으로 고르는 것이었으니, 영양가는 높지만 뒤처리가 힘든 삶은 계란은 패스. 두 번째 마을에선 며칠 전 카메라를 잃어버렸다며 작은 소동을 벌였던, 줄곧 형광 색 옷만 입는 여자를 만났다. 이제 막 자리를 박차고 나서려는 여자는 나에게 너의 오늘은 어떻냐고 물었다. 나는 사아군까지만 갈거라 괜찮다고 했다. 걸을 거리가 상대적으로 짧았고, 더군다나 지금은 카페 앞, 휴식으로의 문턱을 넘어설 짜릿한 순간이니까. 이곳에선 크루아상과 따뜻한 라테 한 잔으로 쌓인 노곤함을 풀어냈다.

   한 번은 약국에서 물집이 난 곳에 붙이는 반창고를 사는데, 약사가 걱정 어린 눈으로 자외선 차단율이 높은 크림이라며 작은 튜브 하나를 건넸었다. 나는 이제 와서 그 작은 튜브를 꺼내어 코 위에 크림을 덕지덕지 발랐다. (짜서 얹었다고 해야 맞는 표현이려나?)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검게 탄 코에도 오늘만큼은 포근한 치료의 손길을 뻗쳤다. 얼굴에 하얀 줄무늬를 그린 여느 해변의 서퍼가 되어 나는 고속도로를 옆으로 낀 둔덕 위를 걸었다. 걸음이 빨라졌다. 그러다 카메라 잃어버렸고 형광 색 옷을 즐기는 여자와 또 마주쳤다. 이번에 그녀는 어디서 머물 것인지 물었다. 아마도 사아군, 그곳의 무니치팔이 아닐까?


   노란 화살표를 따라 돌다리를 건너고 나자, 성당 하나가 보였다. 나에게 허락된 공간이라면 들어가서 기도를 하고 싶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성당 안은 밖에서 보던 것보다 깨나 분주했다. 곧 예배가 시작되려는 듯 사람들이 한 두 명씩 들어와 자리를 채웠고 어질러진 의자의 열과 줄을 맞추고 있었다. 배낭과 스틱을 들고 땀내가 나는 순례자는 얼른 일어났다. 동시에 성당까지 좁게 이어진 길로 주일 예배를 드리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만들어졌다. 나는 그 도열을 거슬러 걸었다. 그 안에서 스스로 차분해질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한 명 한 명을 지나쳐 걸었다. 그러나 성당으로 향하는 그들은 축 처진 어깨를 한 순례자의 얼굴을 굳이 확인해가며 환한 얼굴로 격려했다. 부엔 카미노. (Buen camino.)


   사아군에 도착했다. 오래된 냄새가 폴폴 풍기는 알베르게. 그곳은 공연이라도 하는지 붉은 암막 커튼이 길게 늘어져 있었고, 마이크와 스피커를 통해 가끔 웅웅대는 소리가 났다. 나는 게시판을 눈여겨봤다. 무대 위 연기자 말고 순례자의 흔적을 찾아서. 그러다 더러운 신발이 든 신발장과 세탁실 그리고 주인보다 먼저 보내진 배낭을 발견했다. 순례자를 위한 장소가 맞네! 그제야 둥글게 원을 그리며 계단을 올랐다. 엉성한 바닥과 이와는 반대로 고풍스럽고 장려한 나무 천장을 가지고 있었다. 나보다 먼저 도착해 짐을 풀고 있는 늙은 순례자가 한 명, 그 뒤로 을씨년스러운 컨테이너 박스도 있었다.

   한데 그게 화장실이었다. 전등불은 어둡고 샤워 부스는 잠금장치가 없거나 샤워 헤드가 고장이 났거나 냄새가 나거나……. 하여간 상태가 그랬다. 나는 일찍 도착한 것을 감사하며 게 중 나은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부스 안에는 움직이는 검은 반점들이 종종 보였다. 나는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줄기로 반점들을 슬쩍 밀어냈다.


-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오늘은 엄연히 월요일이고, 무지하게 추웠다고!


   입었던 옷들을 몽땅 세탁기 안에 밀어 넣고 나니 따뜻한 겉옷과 장갑 따위가 간절했었다. 어찌 찾아낸 옷가게는 굳게 닫혀 있고, 언제 여는지와 같은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 일요일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마 내일쯤은 돼야 가게들이 문을 열 거야.


   그렇담 지도에 나온 곳에 발도장이라도 찍자는 심정으로 마을을 휘뚜루마뚜루 둘러볼 밖에. 그러다 식당을 발견하면 거기서 식사를 해야지. 그런데 별 감흥 없이 뻑뻑 사진 셔터만 눌러대는 내 앞에, 발 모양의 셔터가 둘둘 감겨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구멍가게에서 컵라면을 들고 단숨에 숙소로 돌아갔다. 빵을 좋아해서 매일 빵을 먹는 것이 편했고 그게 아무렇지 않은 줄만 알았는데, 뜨거운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 정말 맛있었다. 맛이 깊고 그윽했달까?

   해가 저문 저녁 즈음, 아까 뿌려둔 약에 침대 위 모기는 장렬히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제 감기 기운만 떨어져 주면 된다. 머리에 불덩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서둘러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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