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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뻬로까 Apr 11. 2019

산티아고 일지 21 평범하지만 중요한

¿Dónde estoy en este mapa?

27/04/miércoles

4월 27일 수요일

desde El Burgo Ranero hasta Puente Villarente

엘 부르고 라네로에서 푸엔테 비야렌떼까지

여행한 지 24일, 걸은 지 21일



   순례길을 처음 걷던 날엔 비가 와서 그런지 유난히 바닥에서 꾸물대는 달팽이가 많았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달팽이라 함은 제 몸집보다 몇 배는 되는 껍질을 등에 지고 다니는 생물 아니던가? 나는 이곳의 모래바닥에서 미끌대는 몸을 그대로 내보인 민달팽이를 보았었다. 그리고 그를 보고 부럽다고 느꼈었다. 등이 가벼우니 너의 여정은 편하겠구나. 달팽이마저 제 껍질을 버린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이리 바리바리 싸 들고 왔는지 의문이었다. 7시 반. 마을을 마음에 꾹 눌러 담기 위해 뒤를 돌아보는데 새의 날개를 닮은 구름이 떠있었다. 푸드덕. 나는 어깻죽지에 달린 배낭을 퍼덕였다.


   녹색 이끼가 낀 벤치들이 길가에 듬성듬성 늘어섰다. 그래서 어지간한 벤치가 보이면 앉아서 당기는 종아리를 풀어주고 간식을 꺼내 먹어야지 했다. 햇빛이 잘 드는 곳이 좋을 텐데…… 그때 의자 위 물기가 상대적으로 적은 벤치가 보였다. 나는 배낭을 벤치 등받이에 걸쳐놓고 다리를 쭉 늘렸다. 오늘은 바나나와 초코바. 간식이 두둑이 들려 있는 배낭 뚜껑 주머니에서 그 둘을 꺼내 들었다. 후웁, 하-아. 공기가, 참! 잠시 엉덩이 붙인 곳이 하필이면 먼지 날리는 공사 현장이었다.


- 헤이, 부엔 카미노! (Hey, Buen camino!)


자전거 순례객들이 인사하며 빠르게 지나갔다. 나도 빠르게 입 속으로 바나나를 욱여넣었다.


   최악의 순간! 웬만하면 집 밖을 나갈 때면 일부러라도 화장실을 가는 편인 내가, 마을이 나오기까지 평균보다 더 걸어야 하는 오늘, 화장실을 안 갔을 리 없었다. 나는 분명 아침에 숙소를 나서기 전 화장실을 들렀었다. 그런데 마을은커녕 작은 슈퍼마켓 하나 보일 기미조차 없는 이 시점에, 화장실이 다급히 필요해지고 말았다. 어제 먹고 남은 밥으로 숭늉을 만들어 먹고 나왔는데 아무래도 그게 탈인 듯싶었다. 혹시나 지도에 나오지 않은 간이 화장실이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뻐근해진 배를 부여잡고 걸음을 빨리했다. 길을 걷다 보면 잘 걷다가도 스윽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그것이 남자라면 백발백중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럴 때면 몽골을 떠올렸다. 몽골에선 모든 볼 일(?)을 들판에서 보니까, 그래서 누구도 부끄러울 일이 아니니까, 몽골에서의 여행이 끝나갈 때쯤 그 자유로움을 편히 여겼던 경험을 기억해냈던 것이었다. 이곳에서는 남의 일이라 여겼건만 결국 나도 사람의 눈길이 적은, 아니 없다고 믿을 만한 적당한 장소를 찾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부끄러움에 몸서리 처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문어가 담긴 뚝배기 그릇을 뒤적였다. 유명하다는 말에 시킨 음식은 이상하게 식사 속도를 자꾸만 늦췄다. 다음 마을까지 가면 편하게 쉴 수 있는 알베르게가 있다는데…… 열도 식혔겠다 내일을 위해 조금 더 걷는 것이 나쁘지 않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다음 마을은 중앙 도로를 따라 양쪽가에 가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엔 말을 공동의 것인지 큰 공터도 있었는데, 조각상들로 그득했다. 모양도 가지각색이었다. 동물, 풍차, 탑과 불상? 무엇을 하는 곳일까 궁금해졌다. 심지어는 알베르게를 찾아가는 길, 마을은 도시의 모습을 해서는 가축과 그들의 분비물 냄새를 풍기어 호기심을 자극했다. 숙소로 가까워질수록 냄새가 심해지고 있지만, 읍, 신기한 마을이야.

   막상 숙소에 들어가니 어느 곳만큼 멀끔해 보이는 공간이 드러났다. 건물 안쪽엔 넓은 뒷마당이 있고 그곳엔 빨간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으며, 긴 빨랫줄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회색 빛깔의 고양이가 나긋한 발걸음으로 붉은 조명 하나 켜진 로비를 장악하고 있었다.


   은배와 나는 밖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은배는 전날 부르고 라네로 숙소에서 만난 한국인 여성으로 그 이후 나와 길을 함께 걸었다. 평소 발목이 약해 언제나 열심히 붕대를 감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점심때 식당 고르는 것에 약간의 실수가 있었던 우리는 식당을 쉬이 선택을 할 수가 없었고, 먹을 것 냄새가 난다 하면 주변을 서성대며 어물쩍대기만 했다. 덕분에 우리는 더 많이 걸어야 했고, 결국 돌고 돌아 숙소와 가장 가깝고도 먼 빵집에 들어갔다. 어쩔 수 없어 들어간 곳이었지만 평소 단 것을 좋아하는 은배는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핫초코는 말 그대로 뜨겁게 한 초콜릿, 녹아서 진득해진 초콜릿 그 자체였고 빵도 달콤하니 기분을 좋게 했기 때문이었다.

   식사 후엔 마트도 들러야 했다. 우리가 들어간 빵집 근처 마트는 주인에게 요구해야만 물건을 받을 수 있게 구조였다. 그래서 우선 말이 통해야 했다. 다른 것은 꽤나 앞쪽에 진열되어있어서 직접 꺼낼 수도 있고 손짓으로 가리킬 수도 있었는데, 문제는 그날따라 유난히 알렉산드로가 줬던 당근이 먹고 싶다는 것이었다.


- 캐럿(Carrot) 하나 주세요. 어 그러니까 캐럿은 오렌지색이고 기다랗게 생긴 거예요.


나는 영어를 하지 못하는 주인아주머니와 언어로 시작해 몸짓으로 끝나는 대화를 한창 동안 했다. 그러다 주인아주머니께 펜을 달라고 했다. 영수증을 뒤로 돌려 얼른 펜을 끄적였다. 기다랗게 생겨서 오렌지 빛깔에 초록 줄기가 달린 것. 답을 몰라 전전긍긍하던 주인아주머니는 영수증 뒷면에 그려진 그림을 슬쩍 보더니 유레카를 외쳤다. 그리고 당근을 창고에서 꺼내다 주었다. 이거 맞지? 아주머니의 뿌듯한 얼굴이 보였다.


- 네, 맞아요! 그림 밑에 이것의 이름을 써 주시겠어요?


Zanahoria. 카레를 먹을 때면 매번 젓가락으로 빼놓던 것은, 나에게 있어서 스페인 하면 빼놓지 못할, 절대 잊지 못할 음식이 되었다.


instagram.com/lupe.lo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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