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적 귀인 오류’라는 심리학적 개념이 있다. 어떤 사건의 원인을 해석할 때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외부적인 상황 때문에 그런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면서도(“어젯밤에 커피를 마셨더니 잠이 안 와서 늦잠을 자버렸네”) 타인의 행위에 대해서는 그 사람의 성격 등 내적인 원인으로 인해 그런 일을 했다고 단정하는(“걔 원래 게으르잖아”) 경향성을 말한다. 특히 범죄 뉴스를 볼 때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범죄는 사회적 현상의 성격을 짙게 띔에도 그렇다. 이런 오류는 무의식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타인의 상황을 고려하려는 노력은 언제나 필요하다.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의 저자 네이딘 버크 해리스는 소아과 의사로 샌프란시스코 내의 저소득 지역에서 진료하며 어린 환자들이 겪는 트라우마와 스트레스를 목격하고, 공중보건 측면에서 아동기의 부정적 경험이 신체 건강뿐 아니라 충동성과 폭력성에까지 미치는 악영향을 기술했다. 그에 따르면, 캔자스 시티에서 총기 부상을 당한 소아의 의료 차트를 검토하니 그 짧은 삶의 궤적들이 너무나도 유사했다고 한다. 온몸에 멍이 발견되거나 필수 예방접종을 맞지 않는 등 학대를 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동이 성장하여 유치원에서는 공격적 행동을 하다 ADHD 진단을 받고 학교에서도 부적응하여 문제 행동을 보이다 총격을 당하는 것이 전형적인 총기 피해 사례라는 것이다.
나는 불행이 범죄로 이어지는 과정을 목격하고 기록하는 사람이다. 나에게 ‘전형적인 살인범’을 묻는다면, 해리스와 마찬가지로 가해와 피해가 뒤엉킨 사례를 언급할 것이다. 처음 프로파일러 업무를 시작했을 때 생각보다 계획적 범죄가 적다는 사실에 놀랐다(‘그알’로 범죄를 배운 탓일까). 대부분의 범죄는 순간의 충동을 참지 못해 생긴 일들이었다. 범죄자와의 면담을 통해 그 순간에서부터 앞으로 앞으로 되짚어가다 보면 어떤 키를 발견하곤 했다. 이 열쇠 저 열쇠를 넣고 돌려봐도 덜컹거리기만 하던 문이 드디어 열리듯 도무지 이해되지 않던 범죄를 설명할 수 있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 열쇠는 바로, 그가 평생 겪어온 고난과 결핍이다. 이는 범죄의 성립과 직접적 관련이 없어 수사 자료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기도 한다.
주지하듯이 결핍은 선택지를 박탈한다. 애정의 결핍은 좋은 관계를 선택할 여유를 주지 않으며 금전의 결핍은 삶에 장기적으로 유익한 방향을 고려하지 못하게 한다. 나이가 어릴수록 결핍은 선명한 상처를 남기고, 해소되지 못한 상처는 나이가 들며 덧나거나 흉이 지게 된다. 그 흉터는 매우 집요하다. 반려동물을 죽이며 자신을 협박하는 가족이 있거나, 치과에 가지 못해 50대에 치아가 다 빠져버려 죽만 먹을 수 있다거나, 겨우 구한 몇천 원으로 굶주림을 해소하면서도 맨 정신인 상태를 피하고자 막걸리로 끼니를 대신하거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평생에 걸쳐 꼬리를 물고 누적된다. 평범할 수 있었던 개인이 ‘악한 범죄자’가 되는 사회적 맥락은 구체적으로 존재한다.
면담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한숨이 나왔다. 또 비슷한 과거를 가진 사람이었다. 어떻게 해야 이 사람이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을까. 보고서에는 심리상담, 질병 치료, 직업교육 등이 필요하다고 적었지만 그는 아마 상담도 치료도 교육도 받지 않을 것이다. 십 년 이십 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할 때면 그의 상황은 더 나빠질 텐데. 부질없는 상상을 해본다. 인터넷에서 악마로 불리는 그에게, 가족들이 정서적 공감과 지지를 제공해줬다면 어땠을까. 고등학교는 졸업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지원이 있다면 어땠을까. 하루 한두 끼라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면 어땠을까. 그의 생애에 그런 것들은 없었고 앞으로는 더더욱 없을 줄 알면서도 바라게 된다.
이런 상상이 모여 새로운 ‘악한 범죄자’의 탄생을 막길 바라며 이 글을 썼다. 범죄자의 내면을 통해 사회를 마주하는 몇 안 되는 사람으로서, 내 경험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느낀다. 범죄자를 개별적으로 악한 존재로 치부해버리면 그를 수감하는 것에 그치지만, 사회적으로 소외받았던 존재로 인식하면 제도의 개선을 통해 많은 범죄를 예방할 수 있다. 벼랑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푸라기라도 에어캡이라도 가져다주고, 오래 걸리더라도 튼튼한 안전망을 설치하는 날이 오리라 믿는다. 그리고 ㅡ썩 반갑게 만난 것은 아니지만ㅡ 내가 만난 사람에 대한 개인적 책임도 느낀다. 진심으로 그의 안녕을 바란다. 그를 위해서, 모두를 위해서.
부산민예총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