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그랬다. 천재는 악필이라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 세상은 여기저기서 천재들이 활개치고 다니며 영화에서나 보았던 온갖 기상천외한 미래 사회의 모습을 하고 있을 터였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곳은 마법 같은 환상의 나라가 아니며 나는 그저 글씨를 더럽게 못 쓰는 범재일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수재 정도라도 됐다면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자의 조합에 조금은 애틋한 마음을 담아 바라볼 수 있었을까? 내 손을 거치면 아무리 정성 들여 적은 문장이라도 문자 그대로 해석조차 불가능한 난공불락의 암호문으로 탈바꿈했다. 그 암호문을 남긴 장본인조차 알아볼 수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희주 학생, 잘 왔어요. 이번 중간고사 채점 문제로 연락했어요.”
‘교육학 개론’은 대학교 3학년이 되고 시작한 첫 교직 이수 과목이었다. 작년부터 공부방 봉사활동을 하며 내가 누군가를 가르치는 데 재능이 있고, 또 그 일을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딱히 무슨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아 점수에 맞춰 대학에 진학했던 나에겐 뒤늦게 찾은 장래 희망이었다. 지금껏 학점이라도 챙겨놓자는 마음으로 1, 2학년 내내 대학 생활의 낭만을 즐기기보다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낸 보람이 있었다. 교직 이수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왔을 땐 이제 꿈을 향해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수업에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고 그만큼 좋은 결과를 내고 싶었다.
중간고사 기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교수님 연구실에 방문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이번 시험은 논술에 가까운 서술형으로 답을 써야 했다. 시험지와 답안지를 받자마자 입을 틀어막아 가까스로 한숨에 가까운 탄식만을 내뱉는 데 그칠 수 있었다. 객관식은커녕 두어 줄로 넘길 수 있는 주관식도 아니라니! 며칠 밤을 새우며 공부한 게 아까워 어찌어찌 칸을 채우긴 했으나 시험시간 내내 울고만 싶었다. 볼펜을 잡은 손이 떨리고, 손바닥엔 주르륵 흘러 시험지는 군데군데가 울어 울퉁불퉁해졌다. 쭈글쭈글해진 손가락과 종이가 내 모습인 것만 같았다.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 위 켜켜이 쌓인 종이 탑 맨 위에 땀에 젖은 채로 말라버려 버석해진 종이가 놓여있었다. 그 옆에는 한창 다른 종이 뭉치를 집어 들고 빨간색 펜으로 힘껏 줄을 긋는 교수님의 희끗희끗한 정수리가 보였다. 중간고사란 폭풍이 들이닥친 연구실은 긴급 재난 상황으로 책장이 엎어져 책과 종이 뭉치가 쏟아져 내린 도서관 한 칸을 고대로 썩둑 잘라내 옮겨온 것만 같았다. 문소리에 고개를 든 교수님은 콧대 중간까지 내려가 있던 사각 금테 안경을 추켜올리고 자리에 앉아 잠시만 기다리라 했다. 책과 종이를 밟지 않으려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는 모양새가 안전지대를 찾아 수풀을 헤집는 꼴이었다. 이윽고 종이 뭉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노교수님의 얼굴에 햇살이 비쳤다. 얼굴 주름 사이사이로 녹아든 그림자는 이리저리 얽혀 피부 속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저 시꺼먼 그림자는 나에게도 들러붙었을 터였다. 여기를 나갈 때까진 사라지지 않을 얼룩이었다.
“이번 주까지 채점을 끝내야 하는데 보다시피 답지를 읽기가 상당히 어렵군요. 부분 점수라도 주려면 무슨 내용을 썼는지 알아야 하는데, 희주 학생 본인이 작성한 글이니 여기서부터 한번 쭉 읽어보겠어요?”
“아, 네. 그러니까, 맨 처음 문장이... ‘교육은, 음... 인간이... 생장? 아, 성장하기 위해’...”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이걸 쓴 지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도대체 왜 무얼 썼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걸까. 스스로가 이렇게 답답한 적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교수님의 미간이 좁혀지는 게 보였다. 오늘부터 교수님의 미간엔 주름이 한 줄 더 늘어날 모양이었다. 흠. 한숨 같은 숨을 내쉰 그는 오른손을 들어 이마를 슬슬 문질렀다.
“답을 작성한 본인도 내용을 잘 모르니 곤란하네요. 알다시피 중간고사는 비중이 작기 때문에 학점에 크게 영향을 미치진 않아요. 하지만 기말고사도 이번과 같은 형식으로 출제되고, 그 시험으로 이번 학기 성적이 결정될 겁니다. 그때도 이런 상황이라면 점수를 줄 수가 없어요.”
연구실을 나오자 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중간고사는 일종의 예행연습이었다. 기말시험도 망친다면 다른 보고서나 과제를 아무리 잘해봤자 결과는 기껏해야 C에 불과할 거였다. 공부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글씨를 못 써서 성적표에 씨를 뿌릴 순 없었다. 기말고사까지 남은 시간은 한 달 반 정도. 그동안 대책을 세워야 했다.
예전에 필적 분석을 다룬 영상 클립을 본 적이 있었다. 한글의 세로나 가로길이, ‘미음(ㅁ)’이나 ‘이응(o)’의 모양새로 그 사람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내 성격은 갱생의 여지가 없는 개차반 수준이란 말인가. 아무 생각 없이 맥주를 홀짝이며 영상을 클릭했다가 혼자 울컥해버렸다. 아니지, 저렇게 특정 글자를 분석할 수 있을 만한 글씨를 쓸 수 있다는 게 부럽다. 나도 필적 분석을 받아봤으면. 자음과 모음이 어디에 붙어있는지 알아야 필적이든 성격이든 분석하든 짜 맞추든 할 게 아닌가.
‘글씨 잘 쓰는 법’, ‘손글씨’, ‘한글 연습’
집으로 가는 내내 휴대폰으로 검색을 해봤지만 딱히 좋은 방법은 나타나지 않았다. 예인에게도 연락해 조언을 구해봤으나 대화의 끝은 천천히 또박또박 써보라는 결론으로 이어질 뿐이었다. 그걸 말이라고. 공부를 잘하면 남을 가르칠 때 이게 왜 어려운지 이해를 못 한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예인은 중고등학교 때부터 글씨를 워낙 잘 써 서기를 도맡아 했던 친구였다. 노트 정리를 볼 때면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 자판으로 타이핑했나 싶을 정도였다.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너 나할 것 없이 예인의 노트를 빌리려고 줄을 섰다. 친구들은 내 노트를 보며 그 누구도 감히 베낄 수 없는 철벽 방어 비밀 노트라고 장난을 치며 놀리곤 했다. 지금이야 그냥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기억이지만, 당시에는 마음속 생채기가 날카롭게 그어지는 말이었다. 그런 말을 들은 날이면 집에 가는 길에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져 있거나 알록달록 화려한 펜을 하나 산 다음 자기 전까지 새 노트에 교과서 한 챕터를 통으로 써 내려갔다. 힘을 잔뜩 준 채로 눌러쓰다 보면 손과 팔이 저렸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새벽까지 펜을 쥐었던 날은 평소보다 더 엉망진창인 노트가 남았다. 그때는 그게 그렇게 서러웠다. 한 번쯤은 친구들이 내 노트도 빌려 갔으면 했다. 한 번쯤은 ‘노트 잘 봤어.’라는 인사를 듣거나 ‘그 부분은 어떻게 정리한 거야?’ 같은 대화를 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도 예인과의 대화에서 건진 게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차라리 그림을 그린다 생각하고 마음에 드는 글씨체를 따라 써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에 문득 캘리그래피가 떠올랐다. 일종의 발상 전환이었다. 글씨를 그림같이 그려보자는 마음가짐으로 접근한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마침 동네 문화센터 접수 시간이었다. 재빨리 캘리그래피 수업에 자리가 남았다는 걸 확인하고 저녁 수업을 신청했다. 첫 수업을 기다리며 수업내용을 복습하며 틈틈이 연습할 목적으로 방안지와 볼펜 세트, 만년필까지 구매했다. 이러다가 캘리그래피에 뼈를 묻을지도 몰랐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강의실로 들어갔다. 다채로운 색들의 눈부신 세계에 빠져들 준비를 하고 있던 내 앞에 펼쳐진 것은 흑백으로 가득 찬 과거시대였다. 강사는 캘리그래피의 시작이자 근본이 바로 서예라고 했다.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나 보았던 문방사우를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렇게 첫날에는 먹을 갈아 가로줄과 세로줄을 긋고, 두 번째 수업에서는 동그라미와 세모, 네모를 그리다 세 번째 시간엔 기역과 니은을 썼다. 이제 자음 초반부라면 모음은 대체 언제 들어가는 걸까. 이러다 자음, 모음만 써보다 끝날 판이었다. 한석봉의 후예가 되어 기말 시험장에서 먹을 갈아 화선지에 붓글씨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거의 새것 같은 먹과 벼루, 먹물, 화선지의 무게와 부피가 묵직했다. 이걸 다 쓰려면 대학 졸업반까지 붓을 쥐고 있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캘리그래피는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드디어 대망의 결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내일 치를 기말고사를 대비해 핫식스와 샷을 추가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밤새 책을 놓지 않았다. 가방에 붓펜을 집어넣으며 지금까지의 노력을 떠올렸다. 급하면 시험지에 가로줄과 세로줄을 그어버리자고 생각하자 소란스러웠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아, 깜빡 잊을 뻔했다. 나는 책상 위에 놓여있던 노트북을 두 손으로 꼭 쥐어보았다. 내 글씨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나는 내가 쓴 글씨를 잘 알아보지 못한다. 예쁘게 써보려 힘을 줄수록 오히려 더 괴상한 방향으로 틀어지는 글자를 보고 더 이상의 글씨 연습은 포기했다. 지금 당장 급한 건 시험공부였다. 개발새발로 보일 글이라도 한가득 채우는 게 빈 공간을 훤히 드러낸 답지를 내는 것보단 나았다. 시험을 치른 뒤 교수님이 나를 다시 부를 건 분명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험이 끝나자마자 노트북에 내가 쓴 답을 저장해 두기로 했다. 타이핑으로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나열한 곱고 예쁜 글자들은 언제든 읽을 수 있도록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준비는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