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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르르 Brr Apr 16. 2020

핑퐁 대가 퇴치법


일을 떠넘기는 사람,

이른바 핑퐁의 대가(大家)는 보통 일을 넘길 때 고도화된 <미안하지만> 패턴으로 시작합니다. 그다지 미안하지 않으면서 말이죠. 한두 번 받아주면 호구로 알고 집요하게 파고들므로 애초에 싹을 잘라야 합니다.

 

싫은 티 팍팍 내라 부추기는 글도 있지만 당장 일을 때려치워도 전혀 아쉬울 게 없는 배짱이 있거나, 할당량만 채우면 되는 직무 정도에 국한된 이야기일 뿐 팀으로 묶인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게다가 핑퐁 대가의 위치가 무시할 수 없는 중간급인 경우 더욱 골칫덩이죠. 누군가 속 시원하게 말릴 수도, 다스릴 수도 없습니다. 저항을 받으면 쏟아내는 <라테는 말이야> 공식을 대며 소싯적 일을 많이 했으니 마치 훈장이라도 단 것처럼, 일을 넘겨도 괜찮다는 자기만의 논리를 가동합니다.  자. 기. 만. 의.

 

좋아 인정!

한두 번이야 핑퐁이 승인됩니다만 팀장도 아니면서 본인이 할 수 있거나 해야 할 일을 '상습적으로' 들이밀면 바쁜 나의 스트레스 지수는 떡 상합니다. 기한과 납기가 시급한 업무를 하고 있는 경우면 꼭지는 돌고 미칠지도 모르죠.

 

과장 초기 때였습니다. 대금 집행 전 비용 검수는 예민한 작업이기에 집중을 요합니다. 컴퓨터가 해줄 수 없는 부분은 흐름이 끊기면 어디서부터 다시 봐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방해는 상당한 부담입니다. 그때 여지없는 핑퐁질에 끝이 올라간 나는 정중히 사양했지만 급하지 않으니 해달라는 것이었죠. 일감을 받아놓고 집중을 하던 중 화장실을 가며 핑퐁 대가의 자리를 슬쩍 봤습니다. 대체 무엇을 하길래 그렇게 바쁘다는 사람한테 일을 주고 가는가.

 

핸드폰을 가로로 눕힌 것이 석연치 않던 찰나. 책상과 명치 사이에 폰을 파지하고 무언가를 가열하게 하고 있는 것이죠. 나와 눈이 마주친 그. 게임이라고 단정할 수 없으나 화려한 화면과 당황한 듯 당황 아닌 당황 같은 표정으로 핸드폰을 걷어들이는 행위, 부탁한 일은 다했냐는 급조되고 의연한 얼굴로 봐선 적어도 업무는 아닌 게 확실했습니다. 주고 간 서류파일의 모서리를 세워서 그냥 내려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솟구쳤습니다.

 

더욱 황당한 것은 부탁한 일에 대한 내용 요약과 업무 파악을 나의 입을 통해 하고 있다는 사실.

결국 일의 일부를 부탁하는 정도가 아닌 그냥 그 일을 모두 처리하라는 수준이었습니다. 기가 찰 노릇이죠. 아직도 이런 부류가 살아남아 월급을 녹이고 있을까요.

 

어찌할까요.

팀장에게 달려가 <딴짓하면서 일을 자꾸 넘겨요> 보고 할까요, 아니면 도저히 못하겠다 들이댈까요. 직원 간 사이가 틀어져 생기는 피곤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주요 부서에 자신의 동기들이 포진돼 있다는 말도 거슬립니다. 수 틀린 핑퐁 대가의 탁월한 입 털기 신공은 나를 여러 가지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승진은 시키지 못해도, 승진을 못하게 할 수는 있다>

 

세상 제일 고약한 말이지만 무시하려 해도 자꾸만 맴도는 말입니다. 대충 해줘도 될 것을 성향상 그렇게 할 수 없음을 핑퐁 대가는 제대로 간파합니다. 고통은 고스란히 해주는 사람의 몫이죠. 그렇게 시달리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꾀를 부렸습니다. 그가 대항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들기로.

 

어느 날, 핑퐁 대가께서 여지없이 <미안한데> 냄새를 풍기며 책상에 서류 꾸러미를 올려놓으려 할 때, 나는 기다렸다는 듯 팀장님이 준 일감이 엄청나게 많은 것처럼(위압감 유발용) 넓게 적어놓은 업무노트를 펼쳐 고민을 털었습니다.

 

아니 이걸 왜 나한테?

 

말하느냐는 당황한 표정을 보일 때, 훌륭하신 선배님의 고귀한 조언을 여쭙고자 한다는 학습자세 고취. 대가들의 열에 아홉은 혹여 그 일이 자신에게 옮겨 붙을까 이야기를 꺼립니다. 약발이 받는다는 시그널입니다.(※주의사항 : 어설픈 조언을 해놓고서 내가 도와줬으니 나에게 빚을 진 것이다라는 느낌이 들게 해서는 절대로 안됨) 사안이 1개여도 고민의 흔적을 포스트잇에 잔뜩 적어 여기저기 붙여놓고 펼칩니다. 어차피 내용은 관심도 없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틈을 비집어 핑퐁질을 성공시킨다면 안달 날 때까지 피드백을 주지 않습니다. never!

아쉬운 자가 찾아와 하소연해도 할 말은 준비돼 있습니다. 나에게는 <팀장님이 하달한 일거리가 있다>는 것을 이미 제시했기에 늦어도 될만한 탄탄한 명분이 있습니다.

 

버텼습니다. 여기서 끊어내지 못하면 그가 팀장으로 승진하는 날까지 시달림을 받을게 뻔했습니다.

납기일은 다가오고. 나는 자료를 건네지 않고.

안달 나던 핑퐁 대가께서 직접 시작해보지만 타이밍이 안 맞죠. 팀장 호출에 부름을 받은 그의 답변이 시원찮습니다. 급한 맘에 저를 살짝 불러보지만 대답은 업무노트에 적힌 일감들을 읊으며 다른 일도 많이 밀렸다는 하소연으로 이어집니다. 이상하게 여긴 팀장님 눈치가 좋지 않습니다.

저는 핑퐁 대가와 함께 화끈하게 혼납니다.

본의 아닌 피해자로서 더 이상 일을 떠넘길 수 없게 만드는 프레임.

 

적. 중.

 

비록 그의 핑퐁이 나 아닌 다른 대상을 향해 지속됐지만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티 나는 업무는 쏙 뽑아 본인이 하고 티 나지 않는 업무는 핑퐁질을 하다 일이 터진 겁니다. 그 티 안나는 업무에 작지만 정말 중요한 핵심 내용이 담겨 있었던 거죠. 사태를 파악한 팀장님이 열이 받아 그를 불렀습니다.

 

"일 이렇게 하면서 승진할 생각 마라. 내가 있는 동안 절대 없다."

 

그는 승진했을까요.

네, 했습니다.

대신, 승진하는 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깨졌습니다. 핑퐁 쳤던 일들이 하루 걸러 하나씩 퐁당퐁당 터지며. 까마득한 후배들이 보는 앞에서 아주 지독하고 혹독한, 매서운 대가(代價)를 치렀죠.

 

일을 넘기는 태도는 나이와는 상관이 없는 듯합니다. 선배가 후배에게 훈련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선심 섞기가 몇 번 통할지 모르지만 머리가 희끗해도 본인의 일은 끝까지 책임지고 직접 하며 모범을 보이는 사람이 존경받습니다.

도움이란 주고 싶은 사람의 마음이 우러나올 때 제맛이죠. 이제 막 들어온 신입도 일을 모른다는 안전지대에 숨어 업무를 밀어내다 도태되는 것을 보면, 핑퐁의 대가(大家)는 분명, 대가(代價)를 치르는 게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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