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많이 말랐었다. 외할머니는 나를 만날 때마다 더 먹으라고, 왜 그리 안먹느냐고 성화셨다. 나는 신경이 예민한 편이었다. 그래서 위염도 달고 살았다. 밥 먹는 걸 즐기지 않았다. 대학 때까지는 엄마의 집밥을 그나마 먹을 수 있었지만, 직장생활 시작하고는 아침은 안먹었다. 너무 피곤해서 아침 챙겨 먹을 체력도 없거니와 도시락은 더욱 귀찮은 일이었다. 출근하자마자 일명 노동자 커피라 불리는 맥심 봉지커피를 타서 마셨고 그 기운으로 일을 시작했었다. 그렇게 살다 결혼을 하고 잠시 시부모님을 모시는 시기가 있었는데, 이때 꼭두새벽(늦잠꾸러기 나에게는)에 일어나 아침상을 차리고 출근해야 했다. 우리 엄마 아빠에게도 차려 드리지 못한 아침상을 차리면서 시댁의 위엄과 나의 불효를 깨닫는 시기였다. 그나마 아주 잠깐이었으니 망정이지 조금만 더 길었다면 요즘 애들 말로 멘탈이 탈탈 털리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거라는 걸 나중에는 깨달았지만 난 아직도 이른 아침을 차리는 일엔 서투르다. 내게 이른 아침은 언제나 부담스럽다. 막 자고 일어나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게 힘들다. 우리 엄마는 도대체 어떻게 그 오랜 시절 일정한 시간에 맞춰 아침을 차렸었나 싶다. 아마 우리 아빠 때문이었을 거다. 아빠는 계획적인 사람이다. 특히 기상시간과 식사시간을 정확하게 지켜야 했다. 무계획적인 삶을 경멸하셨다. 게으름을 최고의 단점이라 여기셨다. 나는 사춘기까지 다른 집들도 다 우리집 같은 줄 알았다가 친구들의 자유로운 삶을 보고 충격을 먹었었다. 친구들은 늦잠도 잤고, 밤늦게 귀가도 했고, 만화책도 보았다. 흐흐흐흐.
어쨌든 엄한 아침형 아빠 덕분에 난 아침을 거의 대강 물 말아서라도 먹고 다녔지만, 내가 주부가 되고부터는 아침 차리는 일이 제일 고역이라 남편과 애들이 고생이 많다. 남편은 나와 비슷해서 기상하자마자 아침을 잘 못먹는다. 그래서 도시락을 싸준다. 독일에 오니 회사밥이 너무 맛없다고 점심 먹는 게 힘들다 하니 어쩌겠는가? 아침을 거의 못먹는데 점심이라도 밥을 먹여야 하지 않는가? 애들은 그래도 어떻게든 아침을 먹이지만 얘들도 다 "밥돌이"들이라 참 힘들다. 이제 독일생활 10여 년 넘어가니 큰애는 빵도 좀 먹지만(그리고 밥을 또 먹음), 작은 애는 아침에 "밥 먹을래? 빵 먹을래?"하고 물으면 거의 밥을 선택한다.
그렇게 다른 가족들 먹이고 나면 이제 내 아침을 먹는다. 독일빵 특히 통밀빵을 비롯한 씨앗빵들은 참으로 맛나다. 구수한 향이 식욕을 자극하고 커피 하고도 궁합이 딱이다. 차리기도 쉽다. 그냥 야채나 과일 좀 놓고, 계란프라이만 하나 하면 된다. 커피 내리기가 좀 귀찮으면 캡슐커피도 맛나다. 느지막이 빵에 버터와 쨈을 발라 먹으며 커피 한 모금 마시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이만하면 행복하다." 회사에 나가 바쁘게 일하는 남편과 학교에 나가 공부하는 아들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나는 이 늦은 아침빵을 먹는 순간이 참으로 소중하다. 내가 꿈꾸던 한가한 아침을 지금 살고 있으니 말이다. 마치 그동안 바빠서 못즐겼던 아침시간을 다 보상받는 듯하다.
빵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오늘 저녁 메뉴를 고민한다. 우리집은 저녁만큼은 밥이어야 한다. 거기엔 나 역시 공감한다. 저녁은 꼭 밥을 먹어야 하루를 마감하는 느낌이 드니까.
그렇게 하루를 마감하고 다음날 아침이면 또 부산한 아침밥시간을 꾸리고, 그러면서 나만의 아침빵 시간을 기대한다. 나만의 브런치. 나만의 여유시간. 그 시간 이후로 청소도 빨래도 미룬다. 오늘도 다른 듯 같은 나의 아침을 먹는다. 나의 여유를 먹는다. 난 행복한 중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