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부터 실랑이다. 2주 전에는 K5리그 경기, 오늘은 지역 공식 경기로 그는 새벽부터 온 가족을 깨우고 부산하게 움직였다.
푸우 아빠, 내 배우자 지오는 K5리그 소속 축구선수다. 한국에 들어와서부터 벌써 5년째 축구공을 발에서 떼지 않고 있다. 떨어져 버린 축구화, 맞지 않는다고 던져버린 축구화가 몇 켤레인지 헤아릴 수조차 없다. 옷장은 죄다 운동복으로 가득하다. 그래 봐야 아저씨 축구, 조기축구 모임에 다니고 있을 뿐이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여전히 아주 희박한 '승격'가능성에 자신의 축구 인생을 걸고자 한다. 축구 열정이 남다른 40대 남성이라고나 할까.
처음 시작할 때부터 '나이가 많다'고 거절당해왔다. 이제 정말 축구 '선수'로서 수명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걸 그도 알고 있다. 더 이상 자기 몸이 20대와 다름없다고 주장하지 않는 걸 보면. 안쓰럽기도 하다.
비록 날쌘 주전 선수들이 동시간대 K5리그 경기에 나가고, 본인은 남은 배 나온 선수들과 함께 지역 경기에 출전한다고 아쉬워하긴 했지만, 이번 경기 역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기에 본인 최고의 경기력을 보이리라 이를 갈고 나섰다.
현장에 도착하니 이미 개회식이 시작되었다.
현 시장, 시장 후보, 구청장, 시의원 후보 등 꽤 긴 시간을 할애하여 소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줄 서있었는데. 나중에는 대열이 흐트러져 아예 등을 보이고 앉은 이도 있었다.
고등학교 조회라면 선도부라도 있지. 지루한 진행에 등 돌린 선수 아저씨들을 달랠 방법은 딱히 없어 보였다. 앞에서 축사니 감사패 전달이니 하는 행사 진행 인력은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을 게다.
음료수 삼십 박스를 기부했다는 후원자 기념 촬영 순서에는 상당수 선수들이 아예 우르르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러다 그들을 붙잡은 복음 같은 소식이 있었으니 바로 '내빈 여러분께서 축구공을 슈팅하겠습니다.'였다.
봉사 눈 뜰 소식처럼 화장실 갔던 아저씨들도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다.
슛. 슛. 슛. 거의 십여 개의 공이 덩치 좋은 아저씨들에게 돌아갔다.
지오는 푸우를 목에 태우고 점점 더 앞으로 나갔다. 일요일 아침부터 만화도 못 보고 아빠 손에 이끌려 나온 어린 푸우에게 즐거운 경험을 선물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침 안경 쓰고 갈매기 눈썹을 한 한 내빈, 국회의원이라던가, 그가 푸우를 발견한 모양이다. 주춤주춤 다가오더니 푸우 눈높이에 닿게 가볍게 공을 찼다.
그런데 그때 왠 빨간 상의 아저씨가 쏜살같이 다가와 그 공을 낚아챘다. 간발의 차였다. 럭비 선수인 줄 알았다.
순간 갈매기 눈썹 아저씨가 무서운 갈매기 눈이 되자, 빨간 셔츠 아저씨가 '원래 내가 가지려던 게 아니었다'는 듯 장난꾸러기 같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푸우 손에 공을 건네주었다. 그제야 아저씨 눈썹 갈매기가 제자리로 내려왔다. 그는 지오, 푸우와 악수한 후 돌아섰다.
푸우는 어딜 가든 주목받고 환영받았다.
아이들은 사랑받는 경험을 충분히 해야 한다. 유년기의 정서, 자존감, 대인관계는 평생 그 삶에 영향을 미친다. 성격을 형성하고 관계 맺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푸우가 지금 어리다는 이유로 조건 없는 배려와 특혜를 누리는 건 분명 그의 DNA에 새겨질 거다.
푸우가 그 친절을 잊어버리거나 당연히 여기지 않고, 그에게 호의를 베푼 어른들처럼, 저보다 작은 아이들을 배려하고 챙기리라 믿는다.
자리를 옮겨 경기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팀은 강했다. 원톱으로 나선 지오 발에 공이 걸리지 않았다. '얼굴 허연 오빠' 말로는 유효 슈팅이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전북 현대, 인천 유나이티드 출신 선수가 있단다. 상대가 워낙 셌다고 격려하고 싶지만 평정심을 유지하기 쉽지 않다.
'너 밥값 할 거지?' 지각 멤버가 들어올 때마다 인사를 대신하는 단장님의 그 질문이 가슴에 무겁게 닿았고,
'무늬만 외국인이네.' 주위에서 불평하는 소리가 귀에 날카롭게 꽂혔다. 결과는 4대 0. 상대팀의 완승이었다. 결국 푸우와 나는 밥을 따로 먹었다. '푸우가 매운 음식을 못 먹는다'며 핑계 댔지만 그들을 따라가지 않는 편이 훨씬 더 나았다.
두 번째 경기는 원톱 스트라이커와 투윙스였다. 처음에는 스트라이커가 셋인 줄 알았는데 지오가 양 옆은 윙이었다고 정정했다. 상대팀은 빠르고 몸짓이 날렵했다.
조마조마했지만 전열을 가다듬은 우리 팀은 첫 번째 경기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공격 라인에 활기가 돌았고, 수비에서 실수가 많이 줄었다.
뒤에서 '외국인 용병을 쓰고 그래. 불공평하게.''우리는 왜 없는 거야.' '이탈리아계 스위스 사람이래''아, 이탈리아, 스위스...' 등등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메라 들고 지오 쫒느라 관중석에서 꽤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 들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예 경기를 보지 않고 멀리 떨어져 참새에게 빵가루를 떨구며 돌아다녔던 푸우도 다 들었단다. '가자, 지오!' 뭐 이런 소리. 그것만 들었으면 다행이고.
결과는 5대 2. 우리 팀 승리였다. 지오는 2골을 넣었다. 드디어 나와 푸우는 밥 먹을 자격이 생겼다. 휴.
오전 내내 우리 쪽 관중석이 찬물 끼얹은 듯 조용해서 어디 있는지도 몰랐던 '머리 노란 오빠'가 '오늘의 MVP'라며 지오를 추켜세웠다. 하루 종일 긴장했는지 아님 무슨 다른 이유로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던 단장님이 '오늘 가장 고생한 이들은 네 아내와 아들'이라며 수박을 하사했다. 아침부터 벤치에 있던 수박 세 덩이 중 하나를 통 크게 지오에게 준 것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푸우가 이모와 통화하면서 말했다.
"(골을 넣었는데) 트로피는 안 주고 수박을 주더라."
하하하. 우리 모두 웃었다.
오후 내내 참새를 쫒느라 푸우 얼굴이 꾀죄죄하다. 다음 주는 결승이라는데 또 갈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