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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울민트 Jun 09. 2022

기운 나라고 먹었다

헬스장 탐구 소설

아침에 시리얼, 점심에 두유, 저녁에 과일이었다.

그 방법으로 40KG대 저체중을 유지했다. 결혼 전까지.


무슨 과학적 근거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저녁 식사는 무슨 일이 있어도 6시 이전에 마쳤다. 그게 맞다고들 하니까.


식사 시간을 놓치면 불같이 화가 났다. 어떤 사정으로 6시를 일분이라도 넘기면, 아무것도 먹지 않고 저녁 내내 짜증만 부리곤 했다. 사람들은 내가 본 투 비 마른 체형인 줄 알았지만 유별난 식습관을 철저히 지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랑받고 싶었다.

예쁘다는 여자들은 모두 말랐기에 나도 말랐어야 했다.


난 소녀였을 때조차 나 자신을 ‘대녀’라고 불렀다.

‘소’를 붙이기 민망할 정도로 난 어렸을 때부터 기골이 장대한 여자였다.


키는 반에서 항상 1~2번째로 컸고, 몸무게도 다른 아이들이 모두 40kg 대일 때 혼자 50~60kg에 육박했다.    


그땐 내 큰 뼈대가 부끄러웠다.


손목이 가늘지 않은, 꽃잎처럼 퍼지는 플레어 스커트 차림이 어울리지 않는 나를 보며 ‘못생겼다’고 생각했다.


청순가련하지 않으니 여성스럽지 않았다.

굵은 손목과 그에 걸맞은 코끼리 다리. 대사 효율도 좋아서 평소보다 더 먹었다 싶으면 금세 살이 올라왔다. 음식을 조금 줄여봐야 티가 나지 않았다. 뼈 자체가 굵어서.


여자로서 저주받은 몸 아닌가. 어차피 예쁘기는 글렀으니 대충 입고 일부러 남자처럼 털털하게 행동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걸 다시 하자고? 굶주린 사자처럼 항상 날카로웠던 시절로 돌아가자고?


식단을 떠올리니 한때 고수했던 극단적 절식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불가능하다. 난 더 이상 마른 몸에 대한 강력한 동기부여가 없다.


왜 말라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지금 이 시점에, 내가 왜 식단에 손을 대려는 건가 가만히 생각해봤다.


복근을 만들고 싶어서. 그럼 왜 복근이 있어야 하는데?


이미 복근은 우리 집 거실에 상주하는 그 남자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건 복근을 가졌을 때 생기는 부수적인 이점이다. 보이고 자랑하고 과시하고.


복근은, 내가 운동에 들인 시간과 노력에 대한 표식으로서 얻고 싶은 거다.  

단순히 굶어서 살 거죽만 남기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어디 복근뿐인가. 대퇴근, 대둔근, 견갑근, 광배근, 흉근, 기립근, 이두근, 삼두근...



마르고 싶지 않다.


오히려 지금은 골격이 큰 게 장점이다. 조금만 운동해도 근육이 잘 붙는다. 그저 걸었을 뿐인데 - 알록달록 치장한 여왕벌들을 순식간에 잔챙이 츄파춥스로 만드는- 공간을 압도하는 위용 있는 큰 뼈대가 맘에 든다.    


엉덩이와 허벅지로 이어지는 굵은 다리가 보기 좋다.

레깅스를 입어도 ‘섹시하려고 하는구나’가 아니라

‘운동하네?’ 느낌이 났으면 좋겠다.


레깅스 차림이 민망하다는 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섹시’하려는 의도가 드러난 때문 아닌가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체육인의 레깅스는 전투복에 가깝다. 갈라진 근육 사이사이 난잡한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 근육을 형성한 치열한 시간이 자연스레 연상될 뿐. 존경심마저 다.  

     



헬스장에 오는 사람들은 다양하다.

연령대를 떠나서, 옷차림을 보면 왜 왔는지 알 것 같다.


내가 본 헬스장은 기본적으로 나르시시스트(narcissist)들의 전당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온다. 여기서 운동은 자기 자신을 아끼는 방식이다.


다른 사람 눈을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다.

90% 이상은 자기 운동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가 날 쳐다보는 건 내 레깅스보다는 그 기구가 탐나서일 가능성이 크다. 여기 여자들은 죄다 레깅스니까.


물론 자기애를 넘어 유혹을 시도하는 이도 있다. 아슬아슬하게 아찔하게. 움직일 때마다 특정 부위가 노출되는 의상을 입고 운동하는 척한다. 하늘하늘하고 촉촉해서 무슨 동작인들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신체 일부가 들어갔다 나왔다 공사다망한 와중에, 온몸으로 뿜어내는 천박한 메시지를 부정하듯, 운동에 꽤나 심취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부채만 안 들었지 누가 봐도 엄정화의 <초대> 안무를 하고 있다. 정말 운동에 집중하려 했다면 그런 걸리적거리는 옷을 입을 수 없다. 시선을 끌기 위한 의도라면 모를까.   


자기 과시보다는 애정 결핍인가 싶어 딱하다. 저거 보고 꼬이는 애도 딱 그 수준일 텐데.




내가 흠모하는 말다리 언니들.

나보다 운동 잘하면 다 언니인데, 정말 가끔 힐끔인다.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운동 연배가 느껴지는 튼실한 다리를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고개가 숙여진다.


힙 쓰러스트를 해도 전혀 민망하지 않다. 이 망측한 기구를 압도하는 걸로 모자라 와작와작 씹어 먹는다. 우리 가슴속 충동하고 미혹하는 음란 마귀를 가차 없이 깨부순다. 진정한 여왕벌님이시다!


유튜브에서도 언니들을 만날 수 있다.

기구 사용법부터 운동법, 운동순서, 음식까지 운동에 대한 모든 걸 알려준다.

동영상을 찾아보다 역시나 내 식단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다.   




말 근육 만든답시고 열심히 먹은 게, 특히 운동하러 가기 전 기운 나라고 더 먹은 게 오히려 근육 형성을 방해했다. 운동할 때 나오는 호르몬과 음식 먹고 나오는 호르몬이 상충되니, 공복 상태에서 운동하는 게 가장 효과적으로 근육을 만드는 방법이란다.


최소 운동 세 시간 전에는 식사를 마쳐야 한다. 그리고 근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운동 후 한 시간 안에 식사해야 한다.


아뿔싸. 낭패감이 몰려왔다. 완전 반대로 하고 있었으니.


그러나 내 몸은 과학이었다. 효율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먹고 운동해서 그만한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교정하면 된다. 쉽다. 좋은 운동과 식단으로 역시 과학적인 좋은 결과를 얻으리라 마음을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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