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울민트 Jul 19. 2023

혼자만 아는 고통

미워할 수 없는 악동


본인 챙길 영양제를 잔뜩 주문했다

물론 저 중에 내 몫은 단 한 병도 없다

비난을 의식해서인지 우리 둘을 위해 샀다며

이건 한 스쿱씩 타 먹으란다

저건 하루 한 알, 보라색 약 병과 번갈아서


정말 그 말대로 했다.

그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많이 먹으면 뼈가 굵어진다며

반의 반 스쿱을 뜨라고, 그것도 많다며 난리다

혹시나 싶어 설명서를 보니 하루 두 스쿱.

그제야 마지못해 알아서 하란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얘기가

아련한 전설처럼 떠올랐다

일평생 욕심쟁이 놀부처럼

마을에서 심술궂기로 악명 높았는데

지난해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이

'영감탱이 잘 죽었네' 하더라고.

그래서 어머니가 울었다고.


그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은 게 분명한

나의 사랑스러운 나르씨ㅡ

증조할아버지와 차이가 있다면

그는 집 밖에서도 못됐고

나르씨는 집 안에서만 못됐다는 것.

그 악행의 유일한 피해자이자 증인은 나라는 거.


이 극명한 차이로 인해 나는

증조할머니보다 운이 없다

그녀의 고통은 모두가 알았지만

내 고통은 나만 알기에.


점점 더 냉담해진다

온정적인 대응은 더 큰 괴롭힘을 부른다

저항하면 할수록 내 감정과 정서와 일상이 망가진다


사랑하고 존중하고 진실하고 정직하며 서로를 귀히 여기고 아껴주며 지내고 싶었건만.



일상이 된 괴롭힘에 대응하다 보면

내 삶은 전쟁이 되고

내 낯은 전사의 얼굴이 된다

점점 더 못생겨진다

다시는 쌈닭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나도 예쁜 여자 하고 싶었는

고운 마음으로 예쁘게 말하는.


그러나 안되니까

내 의지만으로는 되지 않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잔뜩 웅크리고 얼음이 되는 것


냉담한 태도는 지금 이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한 최선의 대응이다.


이 지점에서 나르씨에게 고마운 게 있다

더 이상 차가운 사람들을 그저 차갑다는 이유로 비난하지는 않는다. 그들도 그들의 이유가 있겠지 한다.


새벽녘 찬 공기보다 더 쌀쌀했던

버스 터미널 수납 창구 직원의 기계음보다 더 건조했던

음성을 기억한다. 감히 그녀의 삶을 헤아릴 수 없지만, 어쩌면 삶이 즐겁지 않고 일이 고통이었을 터.

생존을 위한 최선의 대응이 끔찍한 음성으로 나타났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세상에는 못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존재자체만으로 충만한 기쁨이었던 그때

이런 말을 했다

'분명 어떤 단점이 있고, 어쩌다 오작동하기도 하겠지만

당신을 연구하고 싶어요.'

이 세상에서 당신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과학자가 되겠다고,

생에 걸쳐 책임져야 할 굉장한 약속을 하고 말았다.


그가 나르씨임을 알기 전에도 후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은 오직 공부와 탐구뿐이다.


다시 힘내어

끝까지 연구해 보자.

미워할 수 없는 악동

나의 나르씨.


언젠가 내 연구실에도

봄은 오고

마침내 나도 예쁜 여자가 될지 몰라








매거진의 이전글 나르시시스트 사랑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