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심장소리엔 덤덤했던 내가 처음으로 울컥한 순간

by 꽁치리
2021.02.06(임신 7주 차)

심장 소리를 들었다. 일단이 심장소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감동적이거나 놀랍지 않았다.

의사쌤과 간호사쌤이 너무나 축하하며 “신기하죠”라고 거듭 말씀하셔서 어쩔 수 없이(?) “너무 신기해요”라 말했다. 이 분들의 프로정신에 감탄하고 감사하면서.

내가 미적지근했던 탓에 태호의 찐 반응을 얼른 보고 싶었다. 태호가 찐하게 감동해줘야 뭔가 아름다운 균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달까.

다행히 태호는 눈물이 핑 돌며 감격스러워했다. "눈물 났어?" 라며 태호의 감동을 거듭 확인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임신테스트기에서 두 줄을 처음 확인했을 때도 덤덤했던 나. 아기 심장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도 덤덤했다.


변명거리를 찾자면, 너무 궁금해서 맘카페에 올라온 다른 아기 심장소리를 먼저 들어봤다.


그렇다고 그 생판 모르는 아기 심장소리가 격하게 신기하지도 않았는데... 맘카페엔 심장소리 듣고 눈물 흘렸다, 너무 감격이다는 사람만 보이던데...


나 언제 이렇게 감성이 메말랐지?


일단이 첫 심장소리, 첫 심장 파동 그래프. 지금 보니 감동이네ㅋㅋ



처음으로 임산부 배지를 달고 지하철 타던 날이 생각난다. 아무도 자리를 양보해주지 않았다. 설마 했는데 남녀노소 모두 마찬가지였다.


'서울은 기본적으로 남에게 무심한 도시야. 모르지 않았잖아. 자리 비켜달라 요구하는 뻔뻔한 임산부로 보이면 오히려 해코지당할지도 몰라. 얼른 배지나 숨기자.'


임신 초기 내가 주로 느낀 감정은 감격, 신기함과는 거리가 멀다.


공중파 TV 채널에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 하나 변변치 않은 나라에 분노하다가,


'맘충'이 될 내 앞 날을 걱정하다가,


세상을 비관하며 아이 낳지 말자고 단결하는 글도 떠올랐고,


아이를 환영하지 않는 '노 키즈 존'과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행동을 하는 아이들을 손쉽게 '급식충'이라 욕하는 댓글들에 한숨짓다가


결국 이 모든 걸 떠안고 가는 건 나라는 암담함에 울다 잠들었던 날들.


아기 첫 심장소리에 감격할 수 없었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그러다 만난 책 한 권이 있다. '어린이라는 세계'.


따뜻하고 냉철한 책이었다 '어린이라는 세계'



그냥 귀여운 책일 줄만 알았는데 어린이를 대하는 차가운 시선과 태도들을 곱씹게 했다.


어른들이 얼마나 쉽게 '너희는 존중받을 만하지 않아'라며 어린이를 덜 중요한 존재로 취급하는지 생각하게 했다.


나도 언젠가 초딩들의 행태가 한숨 나온다고 생각한 적 있고, 스스로 쿨하다고 생각하며 “난 아이들 별로 안 좋아해”라고 누군가에게 말한 적도 있다.


그 모든 것이 부끄러워졌다.


아이의 속도를 기다려주는 대신 금지하는 ‘노 키즈 존’이 환영받는 사회.


우리는 아이들에게만 세상을 신뢰하라 강요하고, 아이답게 귀엽고 착하게 굴기를 기대한 것 아닐까.


분명한 건 아이가 착하게 구는 것보다 어른이 아이를 존중하는 게 먼저라는 거다.


누구나 지나왔기에 다 안다고 착각하는 어린이라는 세계. 하지만 사실 대다수 어른은 자신이 그 세계를 모른다는 것조차 모른다.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어린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는 게 시작일 텐데.


나도 한때 어린이였고, 세상엔 언제나 어린이가 있을 거고, 어린이들은 곧 어른이 되어 자신이 받은 그 존중을 미래의 어린이에게 전해줄 거다.


부모가 아니어도 누구든 이 연결고리에서 책임이 없는 사람은 없다.


이 책을 읽고서야, 임신을 하고도 미처 못한 '어린이라는 세계'를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나에게도 '울컥의 순간'이 찾아왔다.


통통 점프하고 손도 흔들었지, 6센티 일단이


2021.03.15(임신 12주 차)

처음으로 입체 초음파를 봤다. 일단이가 움직이고 있었다. 점프도 하고 손도 흔들고 다리도 뻥 찼다. 그새 많이 큰 일단이는 부지런히 삶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채롭게 움직이는 6cm 일단이. 곧 쑥쑥 커서 '엄마, 나 여기 있어요'라며 존재감을 마구 드러내겠지. 내 배가 꿀렁꿀렁 움직일 테다.

엄마는 입체 초음파 사진을 보곤 벌써 일단이가 사랑스럽다고 했다.

어쩐지 찡했다.
그래, 나도 일단이가 사랑스럽다.
처음으로 이 작은 생명체가 사랑스럽다.

엄마가 날 가졌을 때도 이렇게 사랑스럽게 날 맞아줬겠지.

사랑으로 이어지는 이 연결 안에서 우리 일단이가 자라고 있구나, 싶어 눈물이 핑 돌았다.

6cm 였을 때도 사랑 받는 존재였다는 사실을 나중에 일단이에게 이야기해줘야지.



걱정했던 일들을 피해갈 순 없을 것이다. '노 키즈 존'은 더 늘어나고, '맘충'이라며 흘겨보는 시선을 거리에서 맞닥뜨리는 날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회인 줄 모르고 애 낳았냐며, 네가 좋아서 낳았으니 네가 감당해야 할 무게라는 소리도 들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다는 결심과 결심에 이르게 한 나의 바람과 용기를 소중히 돌보고 싶다.


우리 일단이를 존중하면서 키워야지. 그래서 세상을 신뢰하고 사람을 존중하는 아이로 키워야지.


어느덧 약 50cm로 자란 일단이가 '엄마, 일단 부딪혀보자'고 옆구리를 뻥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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