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도 용기야.
아침 일찍 일어나 식당으로 내려가 따끈한 빵과 요거트, 차, 주스, 우유 등을 양껏 먹는다. 다시 숙소에 올라가 계획된 파리지엔느 코디대로 입고 나와, 파리의 풍경을 그대로 볼 수 있는 통 창 버스에 앉는다.
가이드님의 상세한 프랑스 역사 설명을 들으며 창밖을 바라본다. 연두색과 풀색, 그 어디쯤의 탁기 약간 섞인 푸르른 평야가 계속 보인다. 내가 좋아하는 색이다. 그 평야에 갑자기 툭 튀어나와 있는 나무 한두 개. 왜 군집된 나무가 아니라 한두 개만 있을까? 하고 궁금해하고 있는데, 아기자기한 건물과 예쁜 정원이 있는 시골 마을이 보인다. 그걸 지나니 시가지의 현대 건물이 보인다. 이 시가지에는 조깅피플들이 어디에서나 뛰고 있다. 바쁜 일과 중에도 운동을 열심히 하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 몽마르트르 언덕의 존 윅(영화 <존 윅>에서의 그 '존윅'말이다.)이 뛰어다니던 그 계단도 별것 아니라는 듯 사진 한 장 찍지 않고 무심하게 휙 뛰어간다. 그렇게 창밖을 보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하던 파리에서의 일상이 끝났다.
그리고 나는 현실 일상으로 돌아왔다. 현실로 돌아온 나에게 파리는 아직도 추억이란 이름으로 즐거움을 주고 있다. 반짝이던 에펠탑, 고즈넉하게 출렁이던 센강, 햇살 가득했던 퐁네프다리가 떠오른다. 지인께 선물 받았던 ‘피아노 치는 소녀들’ 자석의 원본이 그대로 있는 오르세 미술관, 눈이 호강하던 금빛 베르사유도 생각난다. 혈육인 오빠가 저녁에 가서 그곳을 바라보며 꼭 라면을 먹고 와야 한다고 신신 당부했던 신비한 몽생미셸도. (우리 일정은 낮에 방문하는 일정이어서 오빠의 조언을 실천할 수 없었지만...) 이 모든 것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중에도 종종 떠올라 즐거움을 준다.
나는 모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중년이지만, 예쁜 것만 보면 기분이 좋아져서 사진으로 담는다. 어느 지인은 나를 가리켜 '찰떡파이봉지'까지 찍는 사람이라며 신기해한다. 그렇다. 나는 예쁜 것이면 과자봉지든, 풍경이든, 건물이든, 글귀든 뭐든지 찍어서 저장해 두고 우울할 때 꺼내본다. 그러면 우울함이 말끔히 가시는 것 같다.
그런 내가 그토록 아름다운 파리에 다녀왔으니 마음이 치유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것들보다도 더욱 아름다운 것이 있었다. 바로 ‘사람’이었다. 꽁꽁 마음을 닫고 여행을 떠난 나에게 건넨 일행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 유람선에서 손 흔들어 주던 낯선 사람들의 인사와 같은 소소한 다정함이 나의 마음을 치유해 주었다.
또 한 가지 깨달음이 있었으니 다정함도 용기라는 것이다. 나 역시 누군가를 보면 도와주고 싶고, 따뜻한 말을 건네고 싶지만 마음만 그럴 뿐 쉽사리 실천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괜히 도움을 건넸다가 불쾌해하거나 거절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냥 마음만 품고 있던 게 다반사였다. 그러나 여행에서 일행 분들과 처음 보는 관광객들의 다정함으로 치유받은 지금,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 내어 '다정함'을 건네 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원칙을 지킨 결과는 어떠했는가? 예전에 가장 즐거웠던 여행에서 마지막에 연락처를 교환했는데, 그러고 나니 오히려 지금처럼 마음이 애틋하게 그립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또 연락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예 연락할 수 없도록 원천봉쇄된 지금은 훨씬 애틋하게 그립다. 그래서 더 오래도록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만 같다.
"그때 그분, 그 언니. 혹시 보고 계신가요? 제가 몹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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