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엔 독자가 없다

작가 엄마의 골 때리는 라이프

by 권정희

세상은 내 책 **『데스 앤 라이프걸』**을 추천작으로 꼽고, 누군가는 내 문장에서 삶과 죽음을 논한다.

하지만 우리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그 화려한 수식어들은 신발장에 가지런히 벗어두어야 한다.

이 집구석에서 내 책의 지위는 지극히 ‘물리적’이기 때문이다.


큰아들 on과 작은아들 won에게 내 소설은 미스터리도, 휴머니즘도 아니다.

그저 장난감 자동차가 매끄럽게 타고 넘어야 할 ‘15도 경사면’ 일뿐이다.

녀석들은 내 혼신이 담긴 문장 위로 바퀴 자국을 남기며 레이싱을 즐긴다.

복선을 깔기 위해 며칠을 밤새운 페이지가 고작 장난감 차의 접지력을 테스트하는 시험장이 되다니.

하지만 괜찮다. 내 서사가 그 정도 무게감도 못 견딜 만큼 가벼운 건 아니니까.


남편은 한술 더 뜬다. 내가 책을 내밀며 은근한 찬사를 기대할 때, 그는 리모컨 나사를 조이며

“오, 와이프! 드디어 고쳤어!”라고 환호한다.

그의 세계에서 우선순위는 작가 아내의 문학적 성취가 아니라, 단번에 응답하는 TV 채널이다.

나의 지적인 아우라는 리모컨 수리 성공이라는 거대한 업적 앞에 무력하게 휘발된다.

그는 내 작품들의 세계보다는 '나는 자연인이다.' 방송 채널을 더 사랑하고,

심지어 자장가로 틀어놓고 자연인이 된 미래의 자신을 꿈속에서 만나기도 한다.

그는 내 전작 이선동도 읽지 않았다.

물리적으로 고칠 게 없어서라나. 누가 맥가이버 남편 아니랄까 봐.


이들은 자신과 함께 살고 있는 이가 언젠가는 더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낼 누군가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않는다. 아니 신경 쓰지 않는다. 아니 관심도 없다.

하지만 서운해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 지독한 무관심이 나를 깨어있게 한다.

밖에서 아무리 ‘작가님’ 소리를 들어도,

집에 오면 리모컨 건전지 수명이나 걱정해야 하는 이 비대칭적인 일상이 내 위트의 원천이니까.

가장 가까운 이들이 내 책을 읽지 않는다는 건,

역설적으로 내가 그들에게 작가가 아닌 '그냥 나'로 존재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

아 그나저나 심히 걱정은 된다. 이러다 무심이 아니라 무식한 가족들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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