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희에게.
밖에 눈 온다.
너도 지금 창밖을 보고 있다면 부디 그곳이 병실만은 아니길 간절히 바래보아.
어떻게 지내고 있니? 난 지난주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약속이 있어서
3일 내내 새벽에 잤더니 완전 파김치가 돼버렸어. 오늘 아침에 침대에서 나오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그래도 일어나자마자 밖에 나가서 요가+헬스 3개월치 끊고 왔다?
오늘 저녁부터는 컴퓨터 학원에 나가고,
자격증 시험도 오늘 접수하려고 해.
전부 다 내가 시작해 놓고 끝내지 못할 것 같아서 할까 말까 망설였던 일들인데 그냥 다 저질러버렸어. 난 매사 별것도 아닌 일들을 왜 그렇게 고민하는 걸까, 특히 운동이나 학원처럼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일들을 더 시작하기 어려워.
내가 끝까지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없어서 중간에 포기하고 마는 나 자신이 보고 싶지도 않고,
작은 것일수록 더 손해 보고 싶지 않은가 봐.
이상하게 큼직한 것들은 손해 봐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때가 많은데 꼭 천 원, 이천 원 할인받을 수 있던 화장품 같은 데서 더 손해 봤다는 마음이 더 커지는 것 같아.
금요일에 만났던 두 명의 친구 중에 결정을 정말 잘하는 친구가 있어.
뭔가 구경하거나 사러 갔을 때 셋이서 가게에 들어가면 항상 그 친구만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나오지.
뭔가를 선택해야 할 때 결정이 빠르고 한번 결정하면 뒤돌아 보지 않는 친구야.
난 작은 액세서리 하나도 엄청 고민하다가 대부분의 경우 사지 않아서 그 친구가 항상 부럽더라고.
이번에 만나서도 친구의 그런 면이 참 부럽다고 이야기했는데 친구가 자기는 뭔갈 사면 어디에서 같은 물건을 자기보다 싸게 샀다거나 더 좋은 물건이 있다는 이야기들에 귀를 닫아버린대.
그걸 알게 되면 속상하고 후회하게 되니까 선택적으로 차단해서 후회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하더라고.
내가 성공도 실패도 없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을 할 때,
친구는 하는 걸 선택한 뒤에 성공이던 실패던 후회하는 않는 걸 한번 더 선택하는 거지.
주말 동안 친구들에게 좋은 자극을 많이 받은 덕분에 해야지-해야지- 입으로 주문만 외우던 헬스를
드디어 끊게 됐네. 월수금 아침 요가 수업을 핑계로 일단 헬스장에 가면 러닝머신이라도 뛰고 올 수 있겠지 뭐.
난 안 그래도 쫄보 겁쟁이인데 요샌 갈수록 온갖 정보들이 너무 많아져서 선택이 더 어려운 것 같아.
더 좋은 게 있겠지,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으니 나중에 더 가성비 있게 해야 지하는 생각들로 미루다가 보면
뭐든 끝도 없고 선택할 수 없게 되더라고.
지난 주말에 곧 생일인 친구가 있어서 책을 선물하려고 서점에 갔다가 베스트셀러 칸에 읽어보고 싶었던 책을 발견했어. 친구 선물을 사러 간 거였어서 내건 그냥 사지 말까? 도서관에도 있겠지? 싶어 고민하다가 그날은 짐도 많았는데 그냥 지금이 아니면 영영 못 읽을 것 같아서 평소답지 않게 그 책을 샀어.
지하철에 탔을 땐 이미 짐이 너무 많아서 어깨가 끊어질 것 같은데 괜히 샀나 후회했지만 이동하는 동안 생각보다 너무 잘 읽혀서 바로 사길 잘했다 싶었지.
서른여섯에 삶의 정점에 오른 외과의사가 어느 날 갑자기 암에 걸리면서 쓴 에세이였는데
요즘 젊은 암환자도 많고, 굵직한 사건사고도 앉아서 남일 같지 않더라고.
친구들과 한자리에 모여서 맛있는 걸 나눠먹으면서 웃고 떠들 수 있는 주말과 끊어질 것 같이 결리지만 튼튼한 내 어깨, 다리까지 잠시나마 감사해졌어.
올해 다이어리엔 한 해의 성과보다 작은 것이라도 얼마나 많은 선택들을 하고, 노력했는지 적어봐야겠다.
일 년 중 가장 짧은 달인 2월도 벌써 10일이 지났다 친구야.
짧지만 가장 농도 짙은 행복들이 가득한 한 달이 되길 바라 보고 싶다.
봄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