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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과 녹아버린 나의 7월

순식간에 지나간 한 달.

by 권선생

매년 여름은 더워졌지만, 올해는 그 뜨거움이 유독 깊게 스며들었다.

예전에는 8월이 되어야 진짜 여름이 온 것 같았는데, 올해는 7월 초부터 폭염이 찾아왔다.

이불을 덮은 채 사우나에 누워있는 것처럼, 숨이 턱턱 막히는 날씨 속에서

아이들도 하원 후의 놀이터 일상을 포기했다.

그 평화롭던 늦오후의 바깥놀이는 잠시 멈추고, 우리는 집 안에서 시간을 때워야 했다.


1층으로 이사 온 덕분에 층간소음 걱정은 덜었지만,

매트를 깔지 않은 단단한 바닥 위에서 뛰는 아이들이 다치진 않을까

또 다른을 걱정이 한 스푼 추가되었다.

신체 활동이 줄자 아이들의 에너지는 집 안을 가득 채웠고, 잠드는 시간도 점점 늦어졌다.


그날 밤도 그랬다.

신랑은 퇴근 후 저녁을 먹고 있었고, 나는 아파트 커뮤니티 요가 수업에 가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쿵' 소리와 함께 둘째의 울음이 터졌다. 울음이 평소와 달랐다.

놀라 달려가 보니, 눈 위쪽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이도, 나도 얼어붙었다. 정신이 아찔했다.


순식간에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온 가족이 함께 응급실에 갈 수 없으니, 신랑에게 119에 전화하라고 소리쳤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상처 부위를 누르고,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를 달랬다.


"괜찮아, 금방 괜찮아질 거야."


119를 기다리는 10분이 10시간처럼 느껴졌다.


밤 8시가 넘은 시간

구급대원은 소아과와 성형외과 협진이 가능한 병원이 없다고 했다.


"봉합은 24시간 내에 해도 되니, 내일 아침 성형외과에 가시죠."


그 말이 현실적으로 맞는 말이었지만, 무척 서운하게 느껴졌다.


나는 곧장 검색을 시작했다. 상처를 이렇게 놔두면 더 안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멀지만 밤에도 봉합 가능한 병원을 찾았고, 둘째를 데리고 낯선 도심의 밤거리를 달렸다.


병원에 도착하니, 우리와 비슷한 사연의 아이들이 몇 있었다.

누군가는 마취에서 막 깨어났고, 누군가는 봉합 수술 중이었다.

둘째도 수술실로 향했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었다. 근육층까지 찢어진 상태였다.

힘들지만, 밤에 오길 잘했다. 그제야 비로소 길었던 하루가 마무리되는 기분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어린이집에서 전체 공지가 하나 도착했다.


[공지] 수족구 확진 원아 발생


둘째네 반 친구 중 한 명이 수족구에 감염됐다는 내용.

여름철이면 흔하디 흔한 전염병이지만, 그 공지에 워킹맘의 마음은 무너진다.


아이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육아의 대부분을 가정에 떠넘기고 있다.

육아휴직, 가족돌봄휴가와 같이 육아와 관련된 제도들이 있지만

정작 그 혜택을 실질적으로 누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잠복기였던 ㄱ러까.

일주일 후, 둘째 발에 수포가 올라왔고, 입안에도 염증이 퍼져 있었다.

등원 전, 서둘러간 병원에서도 단번에 수족구 진단을 받았다.

첫째도 입 주변에 작은 수포가 올라와 있지만, 아직 수족구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친정에 둘째를 맡기기로 했다.

첫째와 둘째가 떨어져 지내는 게 더 나은 선택이라 믿으면서도

마음 한 켠엔 '미안함'이라는 감정이 깊게 자리 잡았다.


'엄마가 아파도 함께 있어주지 못하는구나'하는 자책도 함께.


며칠 뒤, 첫째 손에도 결국 수포가 올라왔다.

또다시 회사에 아쉬운 말을 꺼내며 내 소중한 연차를 또 쓰게 되었다.

한참 아픈 아이들 사이에서 내 마음도 몸도 지쳐갔다.


조그만 일에도 화가 났고, 그 화가 아이들을 향한 건지, 나 자신에게 향한 건지 자꾸 헷갈렸다.

육아도, 일도, 감정도 모두 엉켜버린 7월이었다.


출근해서 달력을 보니, 어느새 7월의 마지막 주였다.

폭염보다 더 뜨겁고 따가웠던 나의 7월이 흘러갔다.


생각해 보니, 일을 시작하고 2년 만에 가장 큰 위기였다.

그동안 아이들이 크게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준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육아도, 일도, 삶도 결국은 '건강' 위에 존재하는 일들이며,

누군가의 고된 육아가 고립된 투쟁이 되지 않도록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세상이 되길 다시 한번 소망해 본다.


뜨겁고 뜨거웠던 나의 7 월아, 잘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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