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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니샘 Mar 14. 2020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페더 한트케

이전에 꽤 유명한 골키퍼였던 주인공 요제프 블로흐는 건축공사장에서 조립공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아침에 일하러 가서는 자신이 해고 되었음을 알게 된다. 일꾼들이 모여 있는 대기실의 문을 열고 들어셨을 때 마침 오전 새참을 먹고 있던 현장감독이 그를 힐끗 올려다보는 순간 그는 그것이 해고라고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공사장을 떠나게 된다.   


소설 속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여기서 우리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눈짓 한 번으로 주인공이 해고되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는 것만 같아 씁쓸하기까지 하다. 주인공이 그렇게 해고된 것은 정식 직원이 아닌 비정규직이거나 일용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하더라도 해고라는 절차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이렇게 행동한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그동안 숱한 비슷한 사례를 경험했을거라고 짐작한다. 그는 구차하게 해고 절차를 따져봤자 구제되기는커녕 자신만 초라해질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마도 아직 이처럼 해고되는 사례는 우리나라에서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비정규직이나 일용직의 삶은 불안을 달고 사는 삶이다. 그야말로 해고되어 길거리로 나온 이후에는 계획을 세울 수 없는, 하루하루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요제프 블로흐도 이 같은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노동자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해고를 당하고 거리로 나온 그에게는 그때부터 주변이 전과는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화창한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노점 판매대에서 따끈한 소시지를 시켜 먹은 후 그 사이를 지나 극장 쪽으로 갔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그를 불안하게 했다. 그래서 그는 많은 것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두운 극장 안으로 들어가서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왜 그는 주변의 모든 것이 불안하게 느껴지고, 극장 안으로 들어와서야 안심이 되었을까? 그것은 해고를 당한 후의 당연한 심리 상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후에 이어지는 그의 삶을 보면 꼭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삶은 이미 정신적으로 붕괴 상태에 있었다. 길가에 서 있는 경찰에게 인사를 해보지만 경찰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지만 아무도 연결되지 않고, 전처에게는 전화를 걸어 연결되지만 그녀는 블로흐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공원 커피숍에 들어가 맥주를 한 잔 주문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자 그는 그냥 나온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 그는 친구들과도 소통이 단절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처와도 헤어져 지금은 혼자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길거리에서 경찰과 인사를 나누는 것이라든가 커피숍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조차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주인공은 이미 주변과 소통을 하지 못하고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는 소외된 존재인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초상일 수도 있다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사회의 질서에 제대로 순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보다 조금 늦게 출근했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눈짓 하나만으로 길거리로 쫒겨나는 불안한 삶을 이어가면서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것도 없이 어긋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 아닌가 싶어서다.   

그러다가 주인공 블로흐는 극장의 여자 매표원을 뒤따라가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하던 중 “오늘 일하러 가지 않으세요?”라는 말에 그녀를 목졸라 죽인다. 그가 그녀를 죽인 이유는 오직 이 한마디 말 때문이었다. 물론 블로흐는 낯선 그녀의 방에서 아침을 맞으면서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고 그녀가 자신이 처음으로 한 이야기를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말하는 것에 대해 불쾌감을 느끼기는 했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살인의 직접적 동기가 될 수는 없었다. 그를 살인으로 이끈 것은 해고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금요일에 갑작스럽게 해고를 당하고 불안과 절망 속에서 주말을 보낸 뒤 월요일 아침에 그녀가 식사를 가지러 잠깐 나가면서 “오늘은 월요일이구나!”라고 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나서 대화 중에 “일하러 가지 않느냐?”는 말에 격분하게 되고 바깥 복도에서 나는 사람 목소리에 공포로 숨이 막힐 것 같은 상황에서 이런 일을 저지른다. 너무 황당하지만 장난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앞서 이야기의 시작에서 블로흐는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어느 날 아침에 다른 일꾼들보다 늦게 출근하고서 현장감독이 힐끗 쳐다보는 것만으로 해고라고 이해하고 공사장을 떠났다는 것을 말했다. 친구들이나 전처와의 소통이 단절된 채 직장마저도 잃고 불안과 절망 속에서 주말을 보낸 주인공은 비록 하룻밤을 같이 보냈지만 잘 모르는 누군가로부터 오늘 일하러 가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고 갑자기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그러고 나서 범죄가 발각되는 것을 피해 국경 마을로 도피한다. 경찰은 곧 범행 사실을 확인하고 범인을 추적해 온다. 소설을 쓴 한트케는 이 상황을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골키퍼 블로흐의 불안이 살인자 블로흐의 불안과 같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주인공 블로흐나 여자 매표원 모두 ‘일’과 ‘요일’이라는 상징 질서 안에 갇혀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누가 이 질서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이 질서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생각하기조차 싫은 것이다. 그래서 이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고 세상 밖으로 밀려 난 채 쫒기는 블로흐에게 자연스럽게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 이야기 마지막에 블로흐가 축구 경기를 보면서 옆 관객에게 하는 말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그는 경기를 관람할 때 공격하는 시점에서 처음부터 공격수를 바라보지 않고 그가 향하는 골문에 서 있는 골키퍼를 주목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본다.   

“공격수나 축구공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골키퍼만 바라보는 일은 매우 어려운겁니다. 공에서 시선을 돌리는 것은 정말 부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그러면서 “우리는 공 대신 자기편 수비수에게 고함을 지르는 골키퍼를 쳐다보아야한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경기처럼 너무나 빠르고 혼잡하다. 이 때 우리가 봐야하는 것은 공을 가지고 다투는 선수들보다는 잠깐 고개를 돌려 공과 멀리 떨어져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면서 고함치는 골키퍼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은 어떤 모습일까?   

골키퍼는 저쪽 선수가 어느 쪽으로 공을 찰 것인가를 숙고한다. 그러나 저쪽 공을 차는 선수도 골키퍼의 생각을 계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골키퍼는 오늘은 다른 방향으로 공이 오리라고 다시 생각한다. 그러나 키커도 골키퍼와 똑같이 생각해서 원래 방향으로 차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이어서 계속해서 생각한다. 또 계속해서...... 그래서 공을 차기 위해 키커가 달려오면 골키퍼는 무의식적으로 공을 차기도 전에 이미 키커가 공을 찰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게 된다. 그러면 키커는 침착하게 다른 방향으로 공을 차게 된다. 골키퍼에게는 한 줄 지푸라기로 골문을 막으려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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