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의 역설
“성공은 많은 사람을 망친다.”
벤자민 플랭클린이 한 말이다.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성공에는 늘 상실이 함께 한다는 사실에 흠칫 놀란다.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에서 자신이 뭔가를 하나씩 성취할 때마다 반대로 내 주변의 사람은 뭔가를 하나씩 잃게 된다는 사실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물론 내 성공과 내 주변 사람의 상실은 직접적으로는 아무런 관계도 없지만 말이다.
우리는 성공이 한편으로는 상실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를 미리 예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성공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처음 발령받은 날이 생각난다. 그날 나는 무척이나 허둥댔다. 어찌나 허둥댔는지 가방을 잃어버린 줄도 몰랐다. 지하철에서 내려 몇 발짝을 떼는 순간 어깨가 허전한 것을 느꼈다. 그제야 가방을 놓고 내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처음에는 집에 놓고 온 줄 알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분명히 지하철에 탈 때는 가방을 열어 카드를 사용한 것이 생각났다. 그러니 가방을 놓고 내린 것이 분명했다. 그날따라 무슨 여유인지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데 가방이 걸리적거려서 선반에 올려놓고 있다가 여기가 어디지 하고 보니 내릴 정거장이었다. 급하게 내리다 보니 가방까지 챙길 여유가 없었다. 근처의 역무원에게 가방을 잃어버렸다고 이야기하니 열차번호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열차번호까지 기억할 리 만무했다. 대충 내린 시간을 이야기하니 알아보겠다고 하고서는 몇 번째 칸에 탔었는가를 묻는다. 그것도 잘 생각나지 않았지만 대충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 칸인지 모르겠다고 하자 무전기로 서로 연락을 취하는 듯했다. 다행히 다음 역에서 승무원이 확인하니 가방이 있다면서 찾으려면 사당역 사무소로 가야 한다고 가르쳐주었다.
사당역까지 가서 가방을 확인하고 무사히 되찾기는 했지만 무언가 찝찝한 것이 있었다. 그래서 가방을 열어 물건을 하나하나 다시 확인해 보았다. 뭔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하루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 일은 가방을 잃어버린 내 행위가 성공을 무효화하려는 충동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본능적으로 떠올리게 했다. 역시나 나는 무의식 중에 자신의 성공이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동료들의 경멸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가방을 잃어버렸던 그날 저녁에 나는 어쩌면 자기 자신을 타인의 시선으로 보면서 자신이 그렇게 운이 좋은 것만은 아님을 느끼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난 즐겁지도 않았고 가방까지 잃어버렸어. 그러니 날 질투할 거라곤 없어”
실패자가 되는 것은 내가 바라던 상황이 아니었지만 승리자보다는 훨씬 친근하고 안전한 모습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왜 나는 가방 찾은 뒤에도 가방을 다시 확인하는 행동을 했을까? 그리고 가방을 찾았는데도 왜 기분이 좋지 않았을까?
닥터 수스의 동화 <네가 얼마나 운이 좋은 아이지 내가 얘기해줬던가> 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넌 정말, 정말, 정말 운이 좋은 거야. 넌 남겨두고 온 양말 한 짝이 아니잖아. 실수로 크록의 캐번에 남겨두고 온 양말 한 짝이 아니잖아! 네가 그 모든 것이 아니라서 얼마나 고맙니! 누군가 잃어버리고 온 아이가 아니라서 얼마나 고맙니!”
잃어버린 것이 없는 줄 알면서도 괜히 가방을 다시 뒤지는 작은 몸짓은 내가 다른 것, 즉 더욱 걱정스러운 생각으로부터 주의를 돌리는 하나의 방편은 아니었을까? 이제는 자기 자신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부터 말이다. 동화 속의 이야기의 한 구절처럼 자신이 잃어버리는 대상이 되기보다는 무언가를 잃어버리게 되는 편이 더 나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