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와룡 May 17. 2021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읽고서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

북클럽의 다섯 번째 책은 <보라색 히비스커스>다. 작가 이름을 듣는 순간, 1년 전 지인에게서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지인이 소개해준 내용은, 작가가 국내 문학잡지와 진행한 인터뷰였고, 거기에는 다소의 페미니즘 이야기가 섞여 있었다. 국내 독자들이 어떠한 이유로 정상적인 이성 간의 사랑마저 꺼려한다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나는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지지한다. 내가 쓴 작품도 모두 사랑 이야기"라고 대답했던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그 글을 떠올리며 책을 읽어서 그런지 이 또한 사랑 이야기는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부모와 자식의 사랑, 그리고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


재미있게도, 최근 지인에게 추천받은 <만들어진 신>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 문제에 좀 더 공감할 수 있었다. 


먼 나라에 사는 어느 소녀의 성장기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멀리 나이지리아에 사는 소녀의 이야기다. 성장 소설이라는 점과 감정 표현이 서툴다는 점에서는 <아몬드>와 유사한데, 성장에 영향을 준 것은 사뭇 다르다. <아몬드>가 특수한 병을 앓는 주인공이 적극적인 인간관계를 통해 성장하는 것을 그렸다면,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가정에서 자란 주인공이 환경 변화에 따라 소극적으로 성장해나가는 것을 그렸다. 그리고 주인공 이야기 틈틈이 주변 사회 문제를 언급하기에, <아몬드> 보다는 이란 만화 <페르세폴리스>를 떠올리게 한다. <페르세폴리스>도 내게 익숙지 않은 먼나라 이란의 소녀가 복잡한 정치 사회에서 생각을 펼쳐나가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라서.


<보라색 히비스커스>의 캄빌리는 열여섯 살이라고 하니 다 큰 소녀지만, 생각이 어린애 같아서 나이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열 살 정도인 줄 알았다. 뭣보다 큰 이유는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에 눈치를 보고 제 마음을 쉽사리 표현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었다. 몇 살 많은 오빠 자자는 분명하게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아버지 곁을 떠나는 것을 간절히 바라는데, 캄빌리는 아버지를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고 아버지 통제하의 삶이 답답하면서도 그 범위를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아직 덜 성숙했기 때문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성향 탓이라는 생각도 든다. 같은 환경에 처한 사람이 모두 똑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개인 성향 차이일 테니까.


아버지는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책을 다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버지는 좋은가, 나쁜가였다.

캄빌리의 아버지는 사회적으로 성공했고, 주변 사람을 도우며, 정의(독재에 반대하는)를 추구할 줄 아는 사람이다. 또 종교에 무척 신실하다. 어느 모로 봐도 나쁜 사람이라 하기 힘들다. 

그런데 가족에게는 가혹하다. 

그 가혹한 면은 종교에서 나온다. 믿음이 너무 깊어서, 어떤 이유에서든 신의 뜻을 조금이라도 어기는 짓을 하면 처벌로 단죄한다. 문제는 그 처벌이라는 것이 다분히 폭력적이라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 아버지, 즉 캄빌리의 할아버지 파파은누쿠가 손윗사람이 아니었다면, 의심할 바 없이 개종하라면서 주먹을 휘둘렀을 것이다. 그저 손윗사람이었기에 만남을 거부하는 정도로 끝냈을 뿐이지, 손아랫사람이라 할 수 있는 자녀들, 그리고 약자인 부인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미뤄 짐작할 만하다.

그의 부인은 입덧 때문에 사제관에 따라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해서 그에게 두드려 맞아 유산했다. 자자는 어렸을 때 영성체 수업에서 1등을 못했다는 이유로 그에게 왼손 새끼손가락을 잘리다시피 했다. 캄빌리는 고모집에서 이교도인 할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고 아버지에게 뜨거운 물로 발을 지지는 벌을 받았다. 소설 후반에는 파파은누쿠의 초상화를 지키려다가 아버지에게 심하게 맞고 걷어차여 거의 죽을 뻔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울었다. 너를 사랑하기에 그랬다고, 네가 나쁜 길로 들어서지 못하게 하려 그랬다고 하면서.


아버지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했다.

어려운 주변인을 보면 사심 없이 돕고, 위험을 무릅쓰고 정부를 비난하는 신문사를 운영하고, 신학교와 성당에 성금을 내 수많은 아이들이 교육받을 수 있게 했다. 사회적으로는 분명히 훌륭한 사람인데 가족에게 나쁘게 하면, 그를 좋은 사람이라 해야 할까, 나쁜 사람이라 해야 할까? 

남편에게 물었더니,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잘하는 건 아직 통제력이 닿지 않기 때문일걸. 그 사람이 지배자가 된다면 모두에게 가혹하게 할 거야."라는 대답이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어쩌면 아버지는 신부로부터 '하느님과 나란히 찬사 받는', 심지어 '예수님보다 앞에 거론되는' 상황이 흐뭇해서 남들에게 친절했는지도 모른다.


캄빌리의 고모, 즉 아버지의 동생은 그런 그의 행동을 "하느님 노릇"이라고 했다. 모두를 구원하고, 제 말을 따르지 않으면 벌을 내리는 하느님. 그리고 자자는 숫제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이 충실한 종 욥에게, 심지어 자기 아들한테까지 한 짓을 봐. (중략) 왜 하느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죽여야만 했을까? 왜 직접 우리를 구원하지 않았을까?


비록 '하느님'이라고 칭했지만 그 하느님은 곧 아버지이며, 이는 아버지가 하느님 노릇을 한다는 고모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위 대사는 <만들어진 신>에 나오는 말과 소름 끼치도록 흡사하다. 나 같은 사람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질문, "왜 신은 그렇게 잔인해야 하는가?"를, 자자는 아버지를 통해 뼈저리게 겪고 일찌감치 깨달은 것이다. 신실한 종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종교적 가르침에 물든 사람 중에 배움을 얻고 주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종교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가끔 보는데, 자자 또한 그런 사람 중 한 명인 것 같다. 혹시 자자는 무신론자가 되지 않을까.


구원이라는 명목으로 가혹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과연 좋은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그런 신은 과연 좋은 신일까, 나쁜 신일까?


어머니는 옳았을까, 틀렸을까

자자와 캄빌리의 어머니는 순종적인 아내다. 캄빌리를 낳은 이후로 계속 유산하자 사람들이 둘째 부인을 맞으라고 들이밀었는데도 끝까지 거부한 남편에게 고마워하고(자기가 때려서 그랬으니 미안해서였을 텐데), 남편이 사회 문제로 괴로워하고 약해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얻어 맞고서도 도자기 인형을 닦으며 묵묵히 속을 풀고, 입덧이 있어서 좀 쉬고 싶다는 주장도 견지하지 못했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눈앞에서 자녀를 때려도 막지도 못했다. 

어머니의 성품은 학생들이 학위를 끝내기도 전에 일찌감치 결혼한다는 고모의 말에 대답한 내용으로 알 수 있다.


여자의 인생은 남편이 있어야 완성되는 거예요. 그게 여자들이 원하는 거라고요.


고모인 이페오마와 그 딸 아마카가 이른바 '신식 여성'이라면 어머니는 '구식 여성'이다. 

마지막으로 맞아서 유산했을 때는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충동적으로 돈을 훔쳐 고모가 사는 곳까지 달아났지만, 남편의 전화를 받자 어느새 본래 모습이 되어 남편에게 돌아가려 한다. 


내가 남편집을 떠나면 어디로 가겠어요? 말해 봐요, 어디로 가겠어요? 얼마나 많은 엄마들이 자기 딸을 그이한테 들이대는지 알기나 해요?


대사로 보아, '남편 없는 여자의 처지'가 될까 봐 위기를 느낀 모양이다. 그렇게, 어머니는 본래의 삶으로 돌아갔지만, 지속되는 괴롭힘을 견딜 수 없었는지 아버지를 독살한다. 아버지가 늘 마시는 차에 독극물을 타서 천천히....  

옮긴이의 설명에 따르면 그 차는 아버지만의 '성체'다. 어머니는 성체를 중독시켰고, 자자는 성체를 거부했다. 성체를 잃은 아버지는 죽음을 맞았고, 캄빌리의 마음속 신은 사라졌다.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옳았을까? 고모의 말대로 그냥 아버지 곁을 떠나면 안 됐을까? 물론 그런 삶을 살아온 여자가 남편을 떠나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었을지 나로서는 짐작할 수조차 없다. 남편이 가진 것(재산은 물론이고 자녀들까지)은 두되 그 괴롭힘만 없애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자가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히자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실성하고 말았다. 물론, 아들은 3년만에 재력과 사회 분위기를 이용해 풀려나게 되었고, 어머니도 차차 이성을 찾았다.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일까?

가족을 괴롭히던 원흉, 아버지는 죽었다. 비록 자자와 캄빌리가 함께 하고 싶어 했던 고모 가족은 미국으로 떠났지만, 어차피 아버지가 없으면 그들의 집도 딱히 고통스러운 곳은 아니니 원하는 것을 이룬 셈이다. 캄빌리는 웃음을 찾았고, 비록 아마디 신부 곁에 있지는 못하지만 마음의 의지처로 삼았으니 행복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자. 

캄빌리는 오빠 자자만큼 아버지를 거부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있던 삶을 끔찍하게 여기면서도 꿈에서 아버지를 만나보고 싶어 했다. 캄빌리에게는 아버지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어쩌면 괴롭지만 필요한 대상인지도 모른다.

책에는 캄빌리가 누군가가 잘하는 모습을 보고 "내가 저랬으면 좋았을 걸."하고 생각하거나, "이렇게 하면 아버지가 좋아했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장면이 종종 나오는데, 이로 보아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큰 아이임을 알 수 있다. 주체적이라기보다는 남에게 의존하는 스타일인 셈이다. 그래서 자유가 주어졌을 때, 종교에서 완전히 벗어난 듯한 자자와는 달리 다른 유의 종교, 다른 신을 받아들였다. 새 종교, 즉 새 신은 바로 아마디 신부다.


아마디 신부는 마지막 편지에 그렇게 적었다. (중략) 나는 아마디 신부가 말하는 것을 믿는다. 또박또박 쓴 그의 기울어진 필체를 믿는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말했고 그의 말이 참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아마디는 신에게 인생을 바친 신부지만, 아버지같이 맹목적이지 않고 강압적이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백이면 백 옳은 사람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캄빌리는 아버지를 대신해 그를 신성시한다. 뒷 이야기는 없지만 캄빌리 역시 아버지처럼 맹목적인 사람(그 대상이 종교든 사람이든)이 될 가능성이 크다. 작가의 뜻은 아닐지도 모르지만(어쩌면 종교를 가진 사람으로서 주인공이 종교를 완전히 거부하는 것을 쓸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만들어진 신>을 읽고 맹목적인 믿음에 몸서리치게 된 나에게는 결코 해피엔딩이라 할 수 없는 결말이다.



결말이 해피이건 아니건,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참 재미있는 소설이다. 작가의 서술 스타일도 마음에 들고 인물도 매력적이다. 우리나라 독자들이 그처럼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