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단의 열매들은 너무나, 너무나 매혹적이지 않은가."
지키고 싶은 것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을 향한 야망, 이를 위해 반드시 이뤄내야만 하는 것들에 대한 성취욕,그리고 적어도 어제보다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열망을 척도로 삼고 자라온 나에게 야콥의 선택은 사실 충격적이었다. 무엇도 되지 않고자 하는 자의 가장 적극적인 선택,하인학교. 그리고 ‘감염되는 만족감’이라 표현한 그 선택의 실현.
살면서 단 한 번의 보기로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옵션이 눈앞에서 펼쳐지니 처음엔 당황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작가의 수려한 문장이 아니었다면 주인공을 따라가기도 벅찼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실 소설의 서사, 주변 인물들, 그리고 마지막 결말은 나를 크게 흔들지 않았다. 다만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라는 소설의 몸통이 되는 메세지의 울림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 뿐. ‘과연 나는?’ 이라는 질문에 계속 눈만 꿈뻑꿈뻑 대면서.
‘일에 매몰되어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에 대한 고민을 종종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무슨 복에 겨운 소리야’ 하며 손사래를 치기도 하고, ‘그럼 내가 하고 싶은 게 뭔데?’생각하다 TV를 켜기도 한다.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부은 프로젝트를 마친 요즘 같을 때에는 이런 혼자와의 대담이 더욱 잦아진다. 결론은 거의 비슷하다. 다만 이에 소요되는 시간이 점점 짧아질 뿐.
나는 애정이 많은 사람이다. 감정이 풍요로운 인간이다. 호기심이 많고 그래서 질문도 많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스스로의 질문 앞에서 고개를 세차게 흔드는 버릇이 생겼다. 꾸역꾸역 감정과 상념을 절제하는 법을 배운 후 부턴,통제할 수 없는 마음이 더 이상 발현되지 않음에 만족하는 나를 보았다. 야콥의 일기를 보며 끄덕이는 나는,사실 크라우스를 더 닮았다.
'나는 포기하는 것이 어려워서 포기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어.' 라는 말장난 같은 고백을 한 적이 있다. 그땐 아무리 노력해도 새어나가는 것이 진심이라 생각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갑자기 겁이 났다. 소중히 여기던 진심을 상실해버린 기분이 들었다.모든 것을 꽁꽁 싸매는 데 성공한 나는 야콥과 같은 선택을 한 것일까.아니면 주체로서의 삶을 위한 통제권을 획득한 것일까.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그렇게 애써 밀어냈던 상념과 감정들이 문득 보고싶어 고개를 갸우뚱 해 보았다. 답을 내리기에 나는 아직 미숙한데,결국엔 선택을 해야한다는 사실에 조금 머리가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