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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la Sep 17. 2016

[트레바리 문하나] 쇼코의 미소 - 최은영

“우린 이제 혼자네.”

“너 결혼 할거야?”
“아니. 왜?”
“이민은? 너 예전에 맨날 이민 갈거라고 했잖아.”
“안 가. 왜?”
“그냥. 너 어디가면 어쩌나 싶어서.”  


취했냐고 핀잔을 주며 담배를 껐지만 오빠의 말에 묘하게 마음이 쓰였다. 이십대 초반의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것들로 부터 벗어나길 원했다. 오빠의 말을 듣고 보니 당시 입버릇처럼 말했던 ‘난 나갈거야’ 라는 빈번한 다짐이 오빠에겐 으름장처럼 들렸을 수도 있겠다 싶어 미안했다.


지금도 성숙하다 말할 수 없지만, 20대 초반의 나는 더더욱 미숙했다. ‘평범한 가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그에 대한 판타지가 극에 달한 시절이었다. 어찌보면 오빠에게 어리광을 부린거였을지도 모른다. 더 잘해달라고. 더 예뻐해주라고. 애정을 보여달라고. 그 날 선 어리광이 오빠에겐 아마 반대로 받아들여졌을테지.

꼬여버린 소통은 마음까지 뒤틀게 마련이다. 오빠와의 관계가 지금처럼 좋지 못했다. 하나뿐인 피붙이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절대 피해주지 말자’ 라는 침묵의 법 같은 것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지나친 사랑을 못견뎌 하지만 그 덕분에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간 쇼코. 무관심한 할아버지가 서운했지만 그로부터 주저앉은 자존감에 위로를 받는 소유. 이 두 소녀와 할배들을 보며 오빠를 떠올리는 여동생이라니.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해는 금물. 우리는 돈독하지만 다정하진 않다. 오빠와 나는 늘 핀트가 살짝 다르고, 화법도, 톤도, 취향도, 우선순위도 모두 다르다. 그런 오빠가 힘들었다. 쇼코처럼 나에 대한 지나친 사랑이 버거웠던게 아니다. 그저 삶에 대한 오빠의 관대함이 싫었다. 모두를 용서하고 이해하려는 오빠 때문에 나만 더 나쁜년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그래서 난 더 오빠에게 차가웠다. 그럴 여유가 있으면 자기 앞가림이나 잘 하라고 보챘다. 방황하고 실수했던 그 시절의 오빠를 다시 꺼내가며 생채기를 내기도 했다. 영화에 대한 오빠의 꿈을 늘 모른척했고, 작품을 보여주면 시큰둥한 표정으로 “내 취향은 중요하지 않으니까.”라고 어깨를 으쓱댔던 적도 있다.


그런 오빠가 입봉을 했을 때, 여전히 내 취향은 아니었던 그 영화의 마지막 크레딧에서 정말 오랜만에 우리 가족의 이름을 보았다. 눈물이 날 포인트가 1도 없는 영화였는데, 혼자 영화관 구석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더랬다. '내가 부정해 온 모든 시간 동안 누구보다 온전하게 자기 것으로 노력해 왔구나.' 미안했고 안쓰러웠다. 마음에 쌓아둔 방파제가 무너져 파도가 일었다. 소유가 할아버지를 배웅하는 장면에서 그때가 많이 생각났다.


누군가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이유는 나를 붙잡아 주기 때문이다. 누군가로부터 위로받을 수 있는 건 늘 무심한 듯 옆에 있어주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방식으로도 마음은 온전하게 표현될 수 없지만, 이따금씩 꼬여버린 소통에서도 뒤틀리지 않는 마음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러한 순간들로 써내려간 이야기. <쇼코의 미소>. 해설의 제목이 잘 표현했다. ‘순하고 맑은 서사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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