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한지 세 달이 지나고 수습 기간을 통과하여 정직원이 되었다. 매일 들어오는 번역 요청을 그럭저럭 해내면서 새로운 회사의 분위기 파악은 마친 상태였다. 디지털 마케팅이라는 새로운 도메인을 빠르게 정복하고 싶었다. 관련 배경 지식을 쌓으려고 출퇴근길에 관련 유튜브 영상을 보거나 팟캐스트를 들었다. 내부 문서를 꼼꼼히 읽고 동료들에게 직접 질문하여 설명도 들으며 열심히 공부했다. 무언가에 열정적으로 시간을 쏟을 때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다. 여러 지원자 중 나를 선택해 준 회사에 고마워서라도 최대한 빨리 좋은 번역 퍼포먼스를 낼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을 쌓고 싶었다.
전체적인 흐름과 감은 잡혔지만 회사에서 일한 지 반년이 지나도 여전히 앞이 깜깜했다. 참 이상했다. 정보가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야 하는데, 끝없는 정보의 늪에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속의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앗, 내가 학습 능력이 그새 많이 떨어졌나? 이 분야는 나랑 잘 안 맞는 건가? 문과라서 역시 IT는 이해하기 어려운 건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안 그래도 새롭게 익혀야 할 용어와 개념이 많았는데, 변화가 빠른 업계라 새로운 정책과 기술과 용어가 새롭게 쏟아졌다. 지난달에 겨우 익힌 개념이 새로운 정책이 나와 내용이 바뀌거나 갑자기 필요 없어지는 일도 있었다. 게다가 B2B 업계이다 보니 이해관계자가 다양했다. 모두 각자 비전이 달랐다. 시장의 역학 관계를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더 큰 문제는 내가 번역해야 하는 국문 문서에 그 자체에 있었다. 고객 대상으로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온라인에 게시한 이용 설명서인 데다가, 기술적인 설명이 많아서 최대한 국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신경 써서 번역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읽을수록 미궁에 빠져드는 문장들이 많았다. 내가 지식이 부족해서 이해를 못한 것인지, 국문이 모호하게 쓰인 것인지, 아니면 내용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3중 검증이 필요했다. 아무리 봐도 이해가 잘되지 않을 땐 개발자와 기획자에게 가서 이것저것 질문하면서 왕창 꼬여버린 말타래를 차근차근 풀어야만 비로소 번역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다행히 구성원 모두가 성심성의껏 설명해 주시고 도와주셨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정보의 복잡성이 가중되면 발생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혼돈이었다.
번역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이유는 다양했다. 동일한 개념인데 서로 다르게 표기하고 있거나 반대로 표기가 거의 비슷한데 다른 개념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었다. 알고 보니 문장 등장 순서가 꼬여있기도 했다. 최신 정보가 나와 기존 내용이 더 이상 쓸모없는 내용도 발견했다. 기획자가 정보를 너무 적게 주어서 모호해진 것도 있었다. 혹은 정보를 너무 많이 전달하여 불필요한 정보까지 글에 담아 오리무중이 되었다. 물론 개발자도 인간이다 보니 실수로 잘못된 정보를 전달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개발자와 동일한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는 이상 해당 정보의 오류를 한눈에 발견하기 어려웠다. 또한 주어와 목적어 등의 생략으로 모호한 문장이 많았다. 정보 공급자의 지식은 깊어서 일부 내용을 생략해도 전혀 문제를 못 느끼는데 그 외의 사람들의 지식은 얕아 일부 내용이 생략되면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거나 오해할 수 있었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인하우스 번역사로서 나의 일은 국문을 영문으로 번역하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일단 국문이 이해가 되지 않으니 좋은 번역물을 내기 어려웠다. 이게 가장 스트레스였다. 갑갑한 정보의 늪 속에서 나는 어떻게 좋은 번역 퍼포먼스를 낼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원문이 아무리 이상해도 그냥 원문 문장에 충실하게 번역하여 영문 문서를 만드는 것까지만 인하우스 번역사의 업무 범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거면 AI 번역기를 돌리면 되는 것이지 나를 고용할 필요가 없다. 논리적으로 명쾌하게 이해되지 않는 글을 아무리 영어로 번역을 한들, 나의 번역물이 어떤 효용가치가 있을 것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서 이 일에 내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가? 정보의 늪에 서서히 빨려들어가는 기분이 들어서 아침 출근길에 발걸음이 무거웠다.
어떻게 해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