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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la Dec 02. 2024

IT 회사에 첫 출근하다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하면 통역과 번역을 해서 먹고살 수 있다. 나는 한영 통역학과를 졸업했지만 통역학과에서도 번역 훈련을 하고 번역학과에서도 통역 훈련을 한다. 프리랜서로 일할 수 있고 인하우스 통번역 전문가로 일할 수 있다. 선택할 수 있는 분야는 무궁무진하다. 제조, 금융, 의약, 유통, 엔터테인먼트, 게임 등 번역이 필요한 분야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나는 통역보다 번역이 적성에 맞고 한 조직의 일원으로 일 하는 것이 더 좋아서 인하우스 번역사로 일 하고 있다.


2여 년 전, 지금 일 하고 있는 회사에서 입사 면접을 봤다. 면접이란 회사에 지원자의 역량을 가늠해 보는 자리면서 동시에 지원자도 회사가 내 시간을 투자할만한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회사인지 살펴보는 자리이다. 온라인 광고 산업, 회사의 제품에 대한 소개. 그리고 앞으로 회사의 방향에 대한 거시적인 전망과 동시에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새로운 분야였다. 온라인 광고. 그리고 B2B SaaS. 나는 지적 호기심이 있다. 새로운 지식을 접할 생각에 즐거웠다.


나의 업무는 프로덕트와 관련된 문서를 번역하는 일이었고, 회사는 해외시장에 본격적으로 세일즈를 시작해보려고 하는 상황이었다. 복잡한 SaaS 프로덕트인 데다 해외 고객들을 일일이 응대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어려우니 영어로 번역된 문서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서라 함은 고객들이 읽는 유저 가이드, 개발자들이 읽는 개발자 가이드, 잠재 고객들에게 홍보용으로 배포할 핸드북이나 백서와 같은 콘텐츠 등을 말한다. 문서만 제대로 갖춰놔도 24/7 전 세계 고객들의 문의나 어려움에 대응할 수 있고, 잠재 고객들을 대상으로 프로덕트 피칭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방치형 세일즈맨과 마케터, 그리고 고객성공매니저를 게임판에 풀어놓는 것이랄까?


새 노트북을 받고 배정받은 자리에 앉았다. 온톤 회색 빛이었다. 이전에는 어린이 콘텐츠 회사에서 일했던 터라 각종 귀여운 캐릭터 디자인에 항상 둘러싸여 있었는데. 약간 삭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함께 자주 일하게 될 분들을 소개받았다.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마케터, 국문 문서 담당자 등등 모두 젊고 (어찌 보면 너무 어리고) 열정이 가득해 보이는 분들이었다. 이미 7년 차라고 했지만 앞으로 끊임없는 변화가 예견되는 날 것의 스타트업 냄새가 물씬 풍겼다.


일단 정해진 것이 별로 없었다. 번역 프로세스는 당연히  없었다. 점점 영문 문서가 필요해지다 보니 내부 직원이 번역을 하거나 번역 프리랜서 등에게 번역을 맡겼는데 다시 수정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골치가 아팠다고 한다. 기존에 번역해 둔 자료를 쓱 훑어보니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일반적인 내용이 아니다 보니 전문 지식이 있는 프리랜서를 찾았어야 하는데 아마 찾기 어려웠나 보다. 


문서만 문제가 아니었다. 프로덕트도 국영문으로 언어를 지원하고 있었다. 프로덕트도 가입을 해서 죽 둘러봤다. 영어가 어색한 부분이 눈에 띄는 것은 별 문제가 안되었다. 그런 건 내가 앞으로 고치면 되니까. 그런데 새로운 용어도, 모르는 개념도 많았다. 업계 지식과 용어에 대한 공부뿐만 아니라 프로덕트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그래야 필요한 UX 라이팅도 영어로 제대로 작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이 편해지면 경계해야 된다. 일 할 때 머리를 더 쓸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편한 것이다. 편하면 긴장이 떨어지고 따분해진다. 새로운 환경에서 일을 시작하면 머리가 아프다. 긴장된다. 하지만 그 긴장을 즐기는 것이 좋다. 머리를 써야 하는 환경에 가야 한다. 불편한 곳에 가야 한다. 그래야 항상 겸손한 자세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점점 아는 것이 많아진다. 만나는 사람도 다양해진다. 어떤 일을 하든, 편해지면 게임의 다음 스테이지로 갈 준비가 됐다는 신호다. 


나는 용감하게 다음 스테이지로 건너갔고, 초반에 긴장을 놓치지 않고 부지런히 스터디하면 금방 일이 손에 잡힐 거라 믿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출근하러 나설 때의 아침 공기가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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