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나 책이 좋았다. 대학생 때 주로 머무르던 나의 서식지는 도서관이었다. 각종 국가고시, 언론고시, 자격증 시험 등을 위해 공부하는 친구들이 복작복작 모여있는 독서실은 별로 가본 적이 없다. 내가 주로 앉아있었던 곳은 중앙도서관 2층 해외 문학 코너에 있는 낡은 책상이었다.
다른 친구들이 소개팅을 하고 연합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자소서를 쓸 때 나는 카뮈나 쥐스킨트, 릴케를 읽었다. 번역서가 주는 특유의 감성이 있다.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낯선 문장들. 그 알듯 말듯한 기분이 묘하게 좋았나 보다. 한 문장에 오랫동안 머무르기도 했다. 그 머무름이 좋았다. 지구 반대편에서 완전히 다른 문화와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이 활자라는 매개로 나에게 울림을 준다는 사실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해외 문학 코너에 진열되어 있던 작가들이 나의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들보다 더 나를 잘 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도 언젠가는 지구 반대편에서 매력적인 글을 쓰는 작가를 찾아내고 싶다, 나에게 울림을 주는 글을 나의 모국어로 옮겨보고 싶다, 그렇게 해서 내 주변에서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찾고 싶다, 그들과 연결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었다. 아마도 어지간히 외로웠나 보다.
그때부터 "번역서 출간하기"라는 소망을 마음속의 버킷리스트에 담았다. 대학 졸업 후 어린이 출판사에서 영어 학습 콘텐츠를 만들었다. 이후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하고 정부 통역사로 일을 했다. 그리고 유아 콘텐츠 회사에서 해외사업개발을 하다가 지금은 IT회사에서 인하우스 번역사로 일을 하고 있다. 마침내 내가 제일 잘하고, 마음이 편안하고, 더 잘하고 싶은 향상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을 찾았다. 물론 앞으로 또 어떤 일을 하며 살게 될지 모르니 이렇게 단언하면 안 되겠지만. 어찌 됐든 그래서 마음속에 고이 숨겨두었던 버킷리스트를 다시 꺼내보고 싶은 마음의 여유가 조금씩 생겼다. 그 사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일하는 워킹맘 5년 차가 되었으니 어느 정도 집안일과 육아에 요령도 생겼다. 왠지 이제는 때가 된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한 줄기 빛 같은 책을 만났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읽고 넘어갔겠지만, 이상하게 그냥 넘어가서는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작가와 연결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책이 나에게 준 울림을 주변 모두에게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우당탕탕 외서 번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책 번역을 해본 적도, 번역서 출간에 대해서 잘 아는 것도, 번역서 출간을 해본 지인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나는 일하면서 주로 한->영 번역을 해왔기 때문에 영어를 모국어로 제대로 각 잡고 번역해 본 적이 없다. 재미있을 것 같다는 단순한 생각,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용기, 그리고 책을 통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더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내가 가진 전부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나는 충분한 것 같다.
아직 원고 교정 중이고 자가출판이라는 목표를 향해 느릿느릿 나아가는 중이다. 하지만 나의 오랜 소망을 조금씩 이루어나가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매일 마음이 즐겁고 충만하다. 순간의 감정과 생각 하나하나가 소중 하기에 기록으로 남기려고 한다. 물론 요즘 작업 속도가 잘 나지 않아서 고민이긴 하다. 연재글을 예약해 두니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도록 스스로에게 마감을 재촉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하하. 도서 기획자이자, 번역가이자, 편집자이자 마케터의 역할을 과연 잘 소화해 낼 수 있을까? 본업과 육아도 하면서? 우당탕탕 언젠가는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