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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 작가에게 무작정 이메일을 쓰다

by Lyla

이메일을 쓰기 시작하니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였다. 중학생 때 아이돌 팬질하면서도 한 번도 안 써본 팬레터가 순식간에 완성됐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당신의 팬이다! 그동안 일하면서 너무 혼란스럽고 힘들었는데 당신의 책을 읽고 속 시원해졌다. 당신이 쓴 책은 나를 구원했다. 일 뿐만 아니라 내 삶의 대부분의 문제가 당신이 알려주는 문제해결 방식으로 해결되는 것 같다. 이 책을 만난 뒤로 내 삶이 바뀌었다. (이하 생략)"


너무 극성스러운 것은 아닌가 여러 번 읽고 다시 지웠다가 썼다가 했지만 그냥 내 감정에 충실한 편이 후회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리 지웠다 다시 써도 이메일에 담기는 나의 감정은 비슷했다. 감사함, 기쁨, 설렘, 솔직함, 그리고 약간의 간절함.


이어서 나는 테크회사에서 기술 문서 번역과 영어 UX 라이팅을 하고 있다고 내 소개를 하고 링크드인 링크도 첨부했다. 당신의 책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주변에 널리 공우하고 싶다. 필요하면 영상 미팅을 해서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도 좋다. 당신의 의견을 편하게 알려달라.


'보내기' 버튼을 누르고 컴퓨터를 껐다. 그리고 잠시 앉아있었다. 아이와 남편이 잠든 집안은 시간이 멈춘 것 같이 고요했다. 이내 '철커덕'하고 집 근처에 있는 기찻길을 지나가는 새벽 기차 소리에 정적이 깨지고 어서 자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자리에 누워 언제 이런 들뜬 기분을 마지막으로 느껴봤나 곰곰이 생각해 봤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 나선 분명 처음이었다. 아무도 하라고 하지도, 꼭 해야 할 필요도, 누군가를 위해서 하는 것도,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닌, 오로지 내가 하고 싶고, 내가 할 수 있어서 그냥 하는 것. 육아와 살림과 본업으로 꽉 채워진 나의 하루에 일부러 틈을 만드는 것. 그리고 그 귀한 시간을 내가 주인이 되어 쓰는 것. 이것이 오랜만에 느끼는 들뜸과 설렘의 이유였다.


웃음이 났다. 결혼 전, 훨씬 더 어리고 에너지가 많을 때, 시간이 넘쳐흘러 나를 짓누르는 듯한 기분이 들 때는 그저 그 시간을 어떻게든 없애버리려 했던 것이 생각났다. 시즌 10개짜리 미드를 그저 하염없이 정주행 한다던가, 만화방에 가서 엉뚱한 일본 만화책을 뒤적거리다 온다던가 하는 식이었다. 시간을 베어내어 내 뒤로 넘겨버리기 바빴다.


맞벌이 주부에 미취학 아동을 키우는 엄마가 되니 어떻게든 내가 시간의 주인이 될 수 있는 틈을 만들려는 마음이 샘솟았다. 6시 퇴근 후 잠들기까지 아무런 의무도 책임도 없었을 땐 왜 그렇게도 하고 싶은 것이 없었을까. 이젠 퇴근 후 잽싸게 아이를 하원하고 저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집안일을 하는 등 잠들 때까지 눈코뜰새없이 바쁘게 살게 되자 비로소 내 시간을 만들려고 기를 쓰는 것이다. 잠깐씩 짬이 생기면 인터넷 뉴스를 읽고 아이 쇼핑도 하고 남이 만든 콘텐츠를 보며 낄낄대며 쉬는 시간도 참 소중하다. 하지만 쇼핑 후 택배가 집에 도착해도 이젠 일주일 내내 구석에 두었다가 시간이 나고 기분이 내키면 그때 겨우 열어본다.


이메일을 쓰면서 느낀 설렘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싶었다. 이내 잠이 들고 다음날 메일함을 열었다. 그 다음날에도 메일함을 확인했다. 그 다음날에도. 그리고 7일 뒤에 답장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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