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번역서를 출판해도 된다는 작가의 허락을 받고 난 후,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 머릿속에 마구마구 샘솟았다.
정리가 필요했다. 바로 출판 기획서를 작성했다. 십여 년 전, 출판사에서 주니어 에디터로 일할 때는 그렇게도 안 써지던 것이 술술 써졌다. 옛날 옛적 워드로 작성하던 걸 이제는 노션으로 작성했다. 이리저리 디자인도 바꿔보고 아이콘도 고르고 어찌나 재미나는지!
출판사 이곳저곳에 뿌려서 연락이 되는 곳과 협업하여 출판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기획서를 만들었다. 원서 내용과 작가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아마존에 올라와 있는 리뷰 내용들을 발췌했다. 이미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그리고 일본어로도 역서가 나와서 출간되었다는 사실도 소개했다. 한국어 역서의 핵심 콘셉트와 예상 독자 등에 대한 나의 아이디어도 정리했다. 그리고 마케팅 키워드를 나열해 봤다.
#정보설계입문서 #정보설계기초 #모두에게필요한정보설계지초지식
#서비스기획 #UX디자인 #데이터사이언티스트 #데이터애널리스트 #테크니컬라이터 #마케터 #카피라이터
#체계적 글쓰기 #논리적 사고 #문제해결 #데이터관리
#자기계발 #일잘러 #IT회사...
아이와 남편과 그리고 집 안의 모든 가구가 잠든 깊은 밤, 홀로 스탠드 불을 켜고 출판 기획서를 쓰면서 나는 마침내 수동적인 독자에서 능동적인 서포터가 되었다. 이 책이 전달하는 지식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이 책에 대한 애정이 싹텄다. 마치 아기를 낳자마자 아기를 온마음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열성을 다해 키우면서 사랑이 더 깊어지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그렇다. 이 프로젝트는 내 새끼가 된 것이다! 하늘이 점지해 준 아기가 아니라 내가 능동적으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아기를 입양(?)한 기분이었다.
이 아기에게 잘해주고 싶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내가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닌, 그렇다고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것도 아닌, 그 누구에도 알리지 않은 채 혼자서 조용히 노트북을 두드리며 프로젝트를 가꾸는 시간. 이 시간을 쓰는 것은 어쩌면 나에게 있어서 가장 비싼 사치다. 그래서 그런지 기분이 좋았다.
언제부턴가 명품을 사거나 좋은 호텔에서 휴가를 보내거나 비싼 레스토랑에서 외식을 하는 것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었다. 특히 누구든지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는 명품 소비재는 이젠 촌스러워 보인다. 똑같은 명품 브랜드 로고가 붙어있는 옷을 입은 직장인 혹은 주부들이 여럿이서 지나다니는 걸 보면 재미있다. 비싼 돈을 지출했다는 표식을 달고 다니며 도대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걸까 싶을 때가 있다. 나다움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명품 브랜드로 나다움을 철저히 가리고 다니는 것이 과연 행복한 것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돈으로 사는 사치는 이제는 좀 게으르다는 느낌이 든다. 비싼 호텔에서의 숙박, 비싼 음식 등을 소비함으로써 즉각적인 기쁨 혹은 즐거움을 사는 것도 가끔 삶에 있어서 행복한 추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쁨과 즐거움은 즉각적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즉각적으로 사라진다.
이제 나에게 사치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나답게 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느꼈다. 출판 기획서를 작성하고 나서 나는 내가 새로이 입양한 아이를 잘 돌보고 잘 키워서 세상에 꼭 내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참 신기하면서 심장이 무언가 뜨거운 것으로 가득 차오르는 경험이었다.
https://brunch.co.kr/@lylawrites/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