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 줄기 빛과 같은 책을 만나다

by Lyla

인터넷을 열심히 뒤지던 어느 날. UX 라이터에게 도움이 되는 도서를 소개하는 포스트를 읽었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책이 있었다. 국내에 발행된 책은 아니어서 원서로 구매해야 했다. 회사 총무팀에 구매를 요청하고 2 주 뒤쯤 책이 서고에 도착했다. 해외 원서가 으레 그렇듯 가벼운 페이퍼백이었다. 디자인도 굉장히 심플했다. 출퇴근 길에, 쉬는 시간에 야금야금 하루 만에 다 읽었다.


그리고는 그동안 답답했던 속이 싹 풀렸다. 찐 고구마를 먹다가 동치미 국물 쭉 들이켤 때의 그 시원함을 오랜만에 느꼈다.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한 페이지에 몇 문장 없기도 해서 그랬지만 모든 문장이 군더더기 없이 명쾌했다. 내가 일하면서 느낀 불편하고 괴로운 감정을 어쩜 그렇게 정확하게 진단하는지 놀라웠다. 작가는 내가 빠져있는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나서는 지친 마음을 토닥여주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서 나는 다시 용기가 솟아났다. 이 책은 늪 속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동아줄이었다.


아마존 리뷰를 읽어봤다.


새로운 분야에서 일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프로젝트 리드를 처음으로 맡아서 하는데 많은 조언을 얻었다. 정보 설계의 기초를 쉽게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일 뿐만 아니라 삶 전반에 걸쳐 도움이 되는 조언으로 가득 찬 책이다. 등등의 좋은 리뷰가 많았다. 수십 개가 되는 리뷰를 하나씩 읽어나갔다. 전부 외국인들이었지만 동지들을 찾은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얼굴도 모르는 이들인데 나와 처지가 비슷하다니.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생각을 하고 용기를 얻어 일과 삶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했다니. 짤막한 리뷰였지만, 자신들의 경험담과 생각을 솔직하게 공유하는 이들에게서 노트북 화면 너머 인간적인 따스함을 느꼈다.


왜 그랬을까? 사실 나는 아닌 척했지만 혼자 낑낑대느라 외로웠던 것이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내가 번역해야 하는 문서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말하기도, 이미 잘 굴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회사 시스템이 뭔가 이상하다고 콕 집어 설명하기도, 그렇다고 새로운 것을 제안하기도 애매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 놓여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하고 불편한 것은 확실했다. 책을 읽고, 그리고 그 책을 읽은 독자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동안 이런저런 고민들로 인해 겪었던 외로움이 조금씩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내 뒤에서 든든한 지원군이 돼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야. 누구나 그럴 수 있고, 나도 차근차근 생각을 하면 이 엉망진창에서 탈출할 수 있을 거야. 이 책을 쓴 작가도 그랬고, 이 책을 읽은 수백, 수천 명의 사람도 그랬어. 나도 이제 하면 되는 거야.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이렇게 어두운 동굴 속을 헤매다가 한줄기 빛을 보는 순간들을 만나기 위함이다. 나만 괴롭고 외로운 게 아니라는 것.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어려움을 겪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그리고 아무리 복잡해 보이는 것이라도 단순하게 정리하고 끊임없이 생각을 하면 반드시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이런 것을 느낄 수 있을 때는 좋은 책을 읽고 그 책의 독자들과 소통했을 때뿐이다. 이상하게도 실제 나의 생활에서 밀접하게 함께하는 사람들과는 이러한 소통이 불가하다.


평소였다면 이렇게 아마 독서 기록 정도 하고 끝냈을 것이다. 좋은 책을 매개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었다는 기분을 만끽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기뻐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보다 적극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는 곳에서 동지들을 찾아보고 싶었다. 내가 보이지 않는 실타래를 직접 풀어서 더 많은 사람들을 연결하고 싶다는 마음이 요동쳤다. 내가 얻은 이 용기를 주변에 더 많이 나눠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이를 재우고 난 뒤늦은 밤,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컴컴한 서재에 들어갔다. 서재에는 보통 난방을 틀지 않아서 방바닥이 차가웠다. 담요를 온몸에 둘둘 두르고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이메일을 썼다.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https://brunch.co.kr/@lylawrites/119




keyword
이전 03화정보의 늪에서 허우적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