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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leen Aug 27. 2022

브라질 사람 중에도 ISTJ가 있을까?

좀 더 기억하려고 굳이 쓰는 여행기

브라질 사람 중에도 ISTJ가 있을까? 

 ‘삼바'라는 말을 들으면, 설운도의 ‘싸아암바, 쌈바, 쌈바, 쌈바~~’가 머리 속에 자동 재생되거나, 혹은 화려한 의상과 글래머러스한 댄서들의 몸놀림만을 떠올렸으니, 브라질에 가기 전까지 나의 머리 속에서 ‘삼바'는 사실 좀 오염되어 있었다고 해야겠다. 하기사 대부분의 한국 사람이 브라질에 대해 아는 것은 ‘따봉', ‘삼바’, ‘브라질리언왁싱’(!!), ‘호나우두’ 쯤이겠고, 월드컵과 올림픽을 거치면서 브라질의 수도가 리우라는 것을 알게 된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나도 그랬다. 2월의 어느 날, 리우데자네이루에 가서 삼바 카니발을 보기 전까지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것 중 하나로 브라질의 “삼바 카니발”이 꼽힌다는 얘기는 알고 있었지만, 죽기 전에 꼭 봐야할 것이 그것 뿐이던가. 한국에서 거의 24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 정반대인 기후, 치안에 대해 과도한 걱정을 하게 만드는 온갖 뉴스들은 브라질을 우선 순위 여행지에서 밀려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이 공부하던 브라질 친구가 말했다.

  “나 잠깐 집에 좀 다녀올께. 삼바 카니발에 나가야 되서 말이야” 

 응? 삼바 카니발? 게다가 그걸 보러 가는 게 아니라 거기에 나.간.다.고? 

이런 기회가 또 있을까 싶어, 나는 친구에게 물었다. 

 “너 춤추는 거 보고 싶은데, 나도 따라가도 돼?” 그 친구는 브라질 사람 특유의 호쾌한 얼굴로 말했다. 

 “당근이지! 우리 집에 방 많아!” 

리우 해변가의 “내일의 박물관(Museu Do Amanhã) 앞에 있는 Rio TEAMO(리우 사랑해)


 2월의 리우데자네이루는 아침 9시에 이미 40도를 찍는 한여름이었는데 (두꺼운 롱패딩을 공항에 맡길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미세먼지 없는 새파란 하늘 아래, 이 도시는 모든 것이 과도하게 선명했다. 꽃들은 그냥 빨갛지 않고 새빨갰고, 하늘과 바다는 그냥 파랗지 않고 새파랬다. 시력이 갑자기 좋아진 느낌이 들었다. 눈을 씻고 본다, 라는 건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 

라파 Lapa와 산타 테레사 Santa Teresa 지역에 있는 컬러풀한 모자이크 계단 Escadaria Selarón. 1990년, 호르헤 셀라론이라는 아티스트가 자신의 집 앞 낡은 계단을 타일로 보수한 것을 시작으로 셀라론이 사망한 2013년까지 작업이 이어졌다고 한다. 

셀라론 스타일로 만들어진 세가지 버전의 모나리자

파벨라의 벽화를 막 완성한 아티스트 - 오른쪽 위에서 5번째에 태극기도 들어있다.

 

삼바 카니발은 매년 2월경 열리는데, 사흘간의 카니발 기간 동안 온 나라가 법정 공휴일이다. 내가 리우에 도착한 날은 카니발 1주일 전이었지만, 기다리기에 지친 브라질 사람들은 이미 반쯤 축제 기분으로 저녁마다 동네 공원에 모여 각자의 코스튬을 입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었다. 

동네 놀이터에 모여서 코스튬을 점검하고 악기를 연습하는 사람들

 

치안에 관한 걱정을 많이 들었는데, 염려했던 게 무안할 정도로 모두가 환대해주었다. 리우 사람들은 카니발 기간이라 버스 노선이 바뀐 줄도 모르고 기다리고 있는 나에게 구글 번역앱을 켜고 먼저 다가와주었고, 과일 값을 흥정해주었으며, 꼭 봐야하는 해변과 좋은 까페를 알려주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조차, 넌 어디서 왔니? 브라질은 처음이야? 가장 좋을 때 왔구나, 파티를 즐겨! 그리고는 같이 사진을 찍고 볼뽀뽀를 하고 바이바이 인사를 했다. 과자나 콜라, 맥주를 나눠 주기도 하고, 럼 병을 통째로 들고 다니며 사람들의 입에 부어주는 사람도 있었다. 코로나를 겪은 지금은 낯설어진, 어쩌면 다신 볼 수 없는 풍경이겠지만. 

 파벨라(극빈층 사람들이 모여사는 지역)에서 남의 집 울타리 안에 무례하게 카메라를 들이밀지 않는 이상, 사람 없는 외진 밤거리를 홀로 걷지 않는 이상, 관광객들이 다니는 곳은 그렇게 위험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방심은 금물) 

 한번은 거리를 지나가는데 양쪽 팔에 문신이 가득한 험상궂게 생긴 할아버지가 나를 부르길래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포르투갈어로 뭐라고 큰 소리로 얘기를 하는데 알아듣지는 못하겠고…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이리 오라고 하는 것 같아서, 도망가야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 할아버지는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오더니 내 가방의 지퍼를 꼭 닫아 주셨다. 열고 다니면 위험하다고 하시면서. 알지도 못하면서 무서워했던 것이 부끄러웠던 순간.

느긋하신 리우의 동네 아저씨들

 

삼바 카니발의 가장 클라이막스인 퍼레이드가 열리는 곳은 우리나라로 치자면 올림픽 경기장 같은 ‘삼바드로모’라는 곳인데, 폭 100m에 길이 700m의 직사각형 경기장이다. 퍼레이드가 가운데를 지나가고, 양쪽에는 계단식으로 된 관중석과 부스가 마련되어 있어 9만 명까지 수용이 가능하다. 하지만 티켓이 워낙 비싸기도 하고 구하기도 어려워서 경기장 밖에도 사람들이 몰린다.

 퍼레이드에는 매년 치열한 지역 예선을 거친 12개 정도의 팀(삼바스쿨)이 참가하는데, 이를 위해 각 팀들은 1년 내내 준비를 한다. 올해는 어떤 테마와 코스튬으로 어떤 스토리를 연출할지, 총괄 감독과 음악감독, 의상디자이너 등을 스카웃하고 여러 기업의 스폰서를 받기도 한다. 성적이 좋은 감독은 다른 삼바 스쿨로 스카웃 되기도 하고, 성적이 안 좋으면 경질된다니, 정말로 프로 축구의 세계와 닮았다. 그 해의 컨셉이 결정되면 퍼레이드에 필요한 각종 도구와 코스튬, 퍼레이드용 마차 등을 준비하고 제작하는 것은 정해진 파벨라 마을에 맡긴다. 삼바 퍼레이드는 파벨라의 극빈층 사람들에게 1년치 일거리를 제공해 주는 역할도 하는 것이다. 

퍼레이드의 화려한 장식과 댄서들

 

퍼레이드는 저녁 9시쯤에 시작해 그 다음날 아침 6시까지, 그것도 이틀이나 계속되는데 일단 시작되면 정말 땅이 쿵쿵 울릴 정도로 현장감이 대단하다. 삼바스쿨 하나만 해도 화려한 댄서들을 태운 커다란 퍼레이드 마차가 지나고, 그 뒤를 코스튬을 입은 수백명의 댄서들이 따라가는데, 그런 퍼레이드가 12번이나 이어지니 규모가 정말 어마어마하다. 

퍼레이드를 하는 동안 내내 춤과 음악이 멈추지 않는데, 행진하는 댄서들을 보면 그야말로 남녀노소가 다 섞여 있다. 퍼레이드의 무리 속에서 유난히 행복해 보이는 얼굴로 춤을 추시던 어떤 아주머니는 자세히 보니 한쪽 다리가 의족이셨다. 무거운 의상에 땀을 뻘뻘 흘리고 계셨는데, 불편한 몸으로 얼마나 연습을 하셨을지가 눈에 선해서, 그리고 정말 행복해 보이셔서 괜히 울컥했다. 

각 팀 마다 전혀 다른 복장과 음악. 수백명의 댄서들이 함께한다.

빨간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내 친구. 친구네 팀이 2위에 입상해서 거의 잔치분위기였다.

 각 팀의 개성이 가득한 퍼레이드를 보며 감탄하고 먹고 마시고 박수치고 응원하다보면, 멀리서 파랗게 하늘이 밝아온다. 아침이 온 것이다. 


땀에 찌든 얼굴이 부끄러워질 때 쯤 퍼레이드가 끝났다. 아.. 너무너무 재밌었다. 아직도 심장이 쿵쿵 뛰네! 정말 브라질 사람들의 에너지는 짱이야!! 죽기 전에 이건 꼭 봐야되는 거 맞네!!! 라고 감탄하고 있었는데, 친구가 말했다. 

“우리 동네에서 하는 블럭파티가 있는데, 갈래? 맥주 공짜로 줘. 7시부터 시작이야.” 

밤 새서 놀았는데, 오늘 밤에도 또 논다고?? 역시나 에너제틱한 사람들이라 생각하며, 

“알겠어. 그럼 가서 좀 씻고 한 숨 자고,, 한 여섯시 쯤 만날까?” 라고 대답했더니, 친구가 말했다. 

“응? 아니 아침 7시에 시작이라고! 이제 좀 있으면 시작해, 가자!”


친구 말대로 동네에서는 이미 파티가 시작되고 있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음악이 울려퍼지고 있었는데, 이렇게 시끄럽게 하면 주변 주민들에게서 민원이 들어오지 않냐는 나의 질문에 친구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좋은 음악 틀어주는데 왜 클레임을 해?” 

아. 정말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 한나절을 신나게 놀았다. 하늘은 여전히 새파랬고, 여자들이 머리에 꽂은 꽃들은 새빨갰고, 거리에서 카포에라를 하는 남자들의 등은 새까맸다. 모두가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정해진 파티 시간이 끝나자, 물청소 트럭이 거리를 지나가며 파티의 흔적을 말끔히 지웠다. 역시 파티의 프로들이다. 


파티 후에는 청소 트럭이 지나가면서 물청소를 한다. 코파카바나 해변가의 블럭파티


브라질 여행을 하는 2주 동안, 나의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은 두시간을 넘지 못했다. 너무 많은 놀거리가 눈앞에 있어서 잠 따위를 잘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도 힘이 불끈불끈, 피곤하지가 않았다. 나라 전체가 집단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활기차고 즐거웠다. 브라질 사람들의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이 나라에도 ‘수줍다', ‘우울하다', ‘망설이다' 같은 단어가 있을까? 아니, 브라질 사람 중에도 ISTJ가 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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