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기념관건립 소식이 다시 들려왔다. 송현공원부지가 유력하다니 다행이다. 미(美) 군정시절 담장으로 둘러쳐져 주거용으로 쓰였고 이제 서울 시유지(市有地)로 돌아온 귀한 '터'이다. 몇 달 전 신영균 전 의원이 토지를 기부하여 놀랍고 반가웠다. 부지선정 테이블에는 그의 기부를 포함해서 5군데 후보지가 있었다.
지난 추석 연휴에 청와대, 경복궁, 현대미술관을 거쳐 해가 진 송현공원을 둘러보았다. 공원부지에서 열리는 건축 비엔날레를 바라보면서 터에 대한 공허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삼성, 대한항공이 보유했던 송현공원 역사를 검색했다. LH토지공사가 혹시 공공주택을 늘린다거나, 관광객유치의 핫스폿으로 키운다는 발상도 거론되는 데 마음이 무거웠다. 겉모습 관광은 뿌리가 약하지 않을까? 한 국가의 내면과 정신에 대한 경험을 주는 '조용한 아우성'이 관광객의 가슴에 여운을 만들 것이다.
이건희 미술관이 건립되는데 우여곡절이 많다. 예산도 정해지지 않았다. 덴마크의 칼스버그 맥주회사가 떠올랐다. 창업자의 아들 칼 야콥슨 2세는 1882년 글립토테크미술관과 1913년 인어공주동상을 세웠다. 1세기 이상 거슬러올라 간 일이었으니 터를 걱정할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스웨덴의 세계문화유산이 된 스코그쉬르코고르덴 묘지공원도 100년 전 근대화 시기에 마련된 곳이다. 우리 문화와 정신을 복원하는 미술관과 기념관 건립에 100년의 시공간 격차를 좁혀야 한다.
고종과 명성왕후의 거처인 건청궁이 2007년 복원되기까지 한 세기에 걸친 왜곡된 터를 보았다. 미술관이 된 건청궁에서 열었던 조선총독부 미술국전의 의미도 무심히 지나쳤다. 해방 이후 기무사령부였던 터에 최근 현대미술관이 완성되었다. 부끄럽게도 터가 갖고 있던 기억을 겨우 상기할 수 있었다. 그 터를 추억하는 이에게도 '그곳 터'에게도 미안하고 죄스러운 일이었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지만, 눈에 보여야 실감이 난다. 매월 DMZ를 서(西)에서 동(東)으로 이어 걷는 중에 70년 전 6.25 직전 세계정세를 다시 상기한다. 위장평화 속 스탈린, 중공군이 동의한 기습남침이었다. 위령비에 헌화하면서 이념의 명령으로 스러진 젊은 영혼들을 위로한다. 평화는 목숨으로 지킨 자유의 다른 말이었다.
나라가 망한다는 건 참으로 애통했다. 언어를 말살하려 창씨개명까지 했던 일제강점기, 왕궁이 동물원이 된 지 오래였고, 복원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아 왕궁터에서 동물을 만난 어린 나는 그저 구경꾼이었다. 역사의식과 문화와 정신의 계승이 단절된 탓이다. 전쟁, 천재지변 보다 내부의 불화와 안주 속에 서서히 쇠하는 패배의식도 문제였다. 개인도 국가도 흥하거나 쇠락하는 사례를 수없이 겪는다. 물질의 문제가 시급했더라도 정신의 본질을 잃지 않아야 한다.
역사가 길다고 자랑스러운 것만은 아니지만, 518년 조선왕조는 면면히 흐르는 한국적 정신을 찾아 고증해 가야 할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공자와 달리 주자의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과 우주의 이치를 다루는 학문으로 조선땅에서 이념정당이 되기도 하였지만 실학으로도 발전했다. 리(理)와 기(氣)를 따르는 학풍이 동인과 서인으로, 서인(西人)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했다. 소론의 거두 윤증의 3백 년 명재고택은 동학군도 보존하고, 인민군사령부로도 쓰였지만 건재했다. 돈암서원과 파평 윤 씨의 종학당(宗學堂)도 귀한 유교유산이다. 화재로 불탄 종학당을 사료를 토대로 재건했다. 개원한 지 1년째인 유교문화진흥원도 함께 세워졌다. 한국이 대단한 나라라는 것을 한국인만 모른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역사를 통한 교훈에서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이 굳건해질 것이다. '터'는 기억하는데 도움이 되고 터에 기반을 둔 역사문화와 정신이 깃든 곳이어야 한다. 마침 이승만기념관을 국민성금으로 추진하고 있다. 늦은 감이 있지만 누구의 탓을 하기도 부끄럽다. 85세 이승만대통령은 부정선거와 4.19 혁명을 책임지고 하야했다. 공과를 따진다 해도 공산화를 막은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이 아니었나. 정신과 역사를 잊고 정치적 유불리로 지지부진하지는 않을까? '열린 송현' 입간판을 보던 불안감이 옅어졌다. 송현공원에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서둘러 줄 것을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