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박태균 2015년
저자 박태균은 1966년 서울태생으로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이다. <사건으로 읽는 대한민국> <한국전쟁 ><박태균의 이슈 한국사>등을 저술하고 KBS <인물현대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자문위원을 역임했다. 2013.12 <한겨레> 토요판에 1년 6개월 동안 ‘박태균의 베트남전쟁’을 연재하였다.
이 책을 통해 한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과 철수(1964.9.22~1973.3) 그리고 2년 후, 1975.4 북베트남에 의해 사이공 함락을 지켜보았다. 세계 속에서 한국 근세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지금도 세계곳곳에서 내전과 전쟁이 수많은 역사적 교훈에도 불구하고 빈발하고있다. 박정희 시대와 베트남전쟁은 불가분 관계에 있다. 공과(功過)의 비판은 날카롭되 국운의 방향은 리더와 국민이 같은 방향임을 잃지 않을 대원칙은 무엇인가? 진영 논리를 떠나 국가의 운명, 민족의 고난에 대한 혜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The origins df the Korean war>에서 ‘미국이 왜 한국에 갔는가?’처럼, ‘아시아에서 초대받지 않은 미국’이라며 수정주의가 판을 치고 있을 때 ‘미국이 왜 베트남에 갔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최근 냉전사학자 존 루이스 개디스가 ‘유럽에서 초대받지 않은 소련’이 야기한 문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일본 요시다 시게루총리가 한국전쟁을 ‘신이 일본에 내린 선물’이라고 했듯 베트남전쟁은 ‘신이 한국에 내린 선물’로 여겨졌다. 한국인의 기억에 베트남전쟁으로 1970년대 오일달러의 중동건설붐에 편승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미국은 베트남전쟁을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전술로 싸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전포고 없는 전쟁이었다. 주적이 17도 이북의 북베트남인지 남베트남의 베트콩인지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1964.8.4 통킹만 사건(미국 제7함대의 구축함 매독스호가 북베트남 어뢰정의 공격을 받았다고 존슨이 발표)으로 미국이 전쟁에 참가한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어제 내복을 빨아 입었습니다. 물 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왜 수의를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 전사한 어느 학도병의 편지 ㅡ(여는 글. 파병 50돌, 전쟁의 의미를 묻다.)
1부 그들은 왜 베트남으로 갔는가?
파병을 결정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군이 가지 않았다면 주한미군 2개 사단이 베트남으로 이동할 수도 있었다고 답변했다. ’더 많은 깃발 more flag’ 정책을 내건 존슨대통령이었다. 미군 합동 참모 본부는 한국군의 유지비가 적게 된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군축이 오히려 광범위한 실업자 군을 양산해 한국 경제의 짐이 될 가능성이 크고 박정희 정부의 정치적 위기를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를 제기했다. 안보력 확보와 자유민주주의에 공헌으로 시작된 파병은 1965년 경제도 추가요인이 되었다. 66년 브라운각서에 이은 후임 포터대사는 ‘알라딘의 램프’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베트남의 한국군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도록 한다는 쓰이었다. 울진삼척 무장공비에 이어 1968.1.21 북한군 특수부대원들이 청와대를 공격했고 이틀 뒤 미군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했다.
미국이 중국대륙을 잃었을 때 불었던 매카시 선풍. 트루먼(1945~1953) 때 한국전쟁의 제한전과 롤백전략(원래의 국경선을 회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선을 넘어서 적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전술)을 보아왔던 존슨대통령으로서는 루스벨트와 투르먼이 1949년 중국에서 실패의 책임을 모두 뒤집어쓴 것 같은 결과를 베트남전에서 우려했다.
2부 베트남. 그리고 베트남전쟁
냉전시대 아이젠하워(1953~1961)가 신봉한 도미노이론은 중국의 핵무기개발(1964)로 위협을 느낀 케네디(1961~1963), 존슨(1963~1969)에 이어졌으나, 반전운동의 68 혁명의 영향아래 닉슨(1969~1974)은 닉슨독트린으로 미군 정말철수한다. 2년 후 함락된 사이공은 호찌민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역사에 가정이 있겠냐마는 저자는 '베트남을 그대로 놔두었더라면 공산화는 됐을지언정 아시아의 유고슬라비아가 됐을 가능성이 있었다. 게릴라를 이끈 티토는 소련의 패권에 제일 먼저 반기를 들었다. 통일된 지 4년 만에 베트남과 중국 간의 충돌에서 보듯 북거(北拒) 관계에 있던 양국 간의 긴 역사호흡으로 드러났다.'라는 말이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이데올로기가 우선이었다.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에버레디 플랜'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대통령 지엠이 남베트남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함을 알고 있음에도, 냉전의 거대한 괴물 앞에서는 전쟁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한국에 노근리(1950.7.26 미군이 충북 영동 노근리 철교밑에 양민 500명 사살)가 있었다면 베트남에는 밀라((1968.3.16 다낭 남쪽 160km 선미 Son My400명 학살추정)가 있었다.
3부 병사들의 기록
1968년 미군은 점점 늘어 55만 명에 육박했다. 탈영병뿐 아니라 군의 기강이 무너지는 프래깅 fragging이 빈번했다. 규율에 너무 엄격하거나 공격적인 장교에 대한 살해사건이 그것이다. 하이늘 대령은 1971년 주베트남 미군의 상황을 정리하면서 ‘군의 붕괴 The Collapse of the Armed Forces’라고 이름 붙였다. 그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그들 자신과 싸워야 했다.
작전지휘권이 중요했던 이유는 1966 브라운 각서를 통해 특별원조가 미군의 용병처럼 되어 버려 미군의 피해를 줄이려는 작전에 투입되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8년간 5000명의 전사자가 있었고, 채명신사령관은 유신반대로 대장진급도 탈락하고 군복을 벗었다.
통킹만 사건의 매덕스호는 푸에블로호와 같은 도청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적대국의 해안에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의회에서 전권을 받은 존슨이 1년 후 사석에서 “우리의 해군이 고래를 쏘았을 뿐”이라고도 했다. 1968년 베트콩의 구정공세는 청와대습격사건, 푸에블로호 납북사건 일주일 뒤에 있었으나 기대했던 민중의 호응은 없었고 실패로 끝났다.
4부 미국은 어떻게 패배했는가
베트남전쟁시기 미국은 무역 적자로 금이 유출되고 달러가치는 하락했다. 1971년 닉슨은 금태환 정지를 선언하고 기축통화를 포기했다. 전쟁을 끝내려 ‘아시아인의 문제는 아시아인들이 책임지라’는 닉슨독트린이 발표되었고, 평화협상 당시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가 정권을 잡는 배경에 북폭이 있었다. 반전운동은 1967년 히피는 ‘꽃의 아이들 Flower Children’로 지칭되었고 1969년 우드스톡 축제에는 30만 명의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5부 한강의 기적과 감춰진 진실
1965년 본격적인 파병에 한국 내에서 징집이 강화되고 1968년 예비군이 창설되며 주민등록이 실행되었고, 1969년 삼선개헌반대, 1971년 교련반대에 위수령으로 인한 휴교, 1971년 긴급사태를 선포했다. 1972년 유신체제로 사회적 통제시스템이 작동하게 되었다.
6부 미군철수 이후의 세계
1971년 타이에서 무혈 친위 쿠데타가 있었다. 좌빨 외무장관 타낫이 공산주의 중국과 러시아를 향한다는 이유였고, 1972년 필리핀의 마르코스는 계엄을 선포했다. 한국에서도 한 달 뒤 1971.12월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닉슨독트린 이후에 형성된 데탕트가 이들 세 나라에게 위기로 인식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1972년 7.4 공동성명으로 이어졌다.
1975.3 북베트남은 다낭과 사이공 사이에 있는 부온마투옷에서 인천상륙작전과 같은 공세를 펼쳤다. 미국대사관은 작전시간의 혼선에 따라 약속했던 탈출을 성공시키지 못했고 TV에는 보트피플로 보도되었다.
7부 기억되는 것과 기억되지 않는 것
“적어도 주 베트남 국군은 베트남인에게는 고마운 따위야는 아니었고, 또한 앞으로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국군 파월이 우방 베트남을 돕기 위한 것이라는 것보다도 국군 파월에서 얻어지는 국가 실리면을 과잉 선전한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마이너스를 가져오지 플러스는 되지 못했다” 한 종군 기자가 평가한 내용이다.
국제시장에 나오는 국기하강식으로 ‘왜 1970년대인가?’라는 질문이 논란을 만든다. 막걸리 보안법, 식모 ‘영자의 전성시대’, 경부고속도로, 부동산 투기,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 금지곡등이 키워드로 나타났다.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역사라고 믿고 있는 기억이다. 국민이 지키고 싶은 정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곧 안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