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토지 3권. 최참판댁의 몰락으로 우울해진다. 너무 많이 등장하는 사투리마저 괴롭게 들린다. 아마 최치수가 살해당하는 모습과 그 과정에 배태되어있는 '대를 잇는다'는 인습과 전통의 케케묵은 냄새들을 맡았기 때문아닐까.
사람의 목숨들이 속절없어 보여서인가? 구한말 역사가 슬퍼서인가? 청춘때에 읽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이유가 바로 지금 느끼고있는 것과 같은 심정이었을것 같다. 소설을 읽다보면 어느틈엔가 뇌리에 스며들어있고 몸에도 흠씬 배어있는 구시대 정서를 떠올리는 일이 유쾌하지 않은 것이다.
박경리 작가가 소설<토지> 의 맥락을 알게하는 일이라 여기며 견디며 읽어 갈 것이다. 최재형과 어윤중등 독립운동가에 대하여도 이해의 폭을 넓히며 이동진의 역할, 성장해가는 2세들의 삶을 지켜보는 일은 대하소설의 묘미이리라.
제3편 생명의 강, 생명의 불꽃
제10장 살인자의 아들들/ 구제된 영혼/ 어린 방랑자/ 생명의 불꽃/ 가난한 양반 의식/ 돌아온 임이네/ 이 부사댁 도령/ 서희의 출타/ 용이의 변신/ 욕정의 제물 김 서방댁 21장 바닥 모를 늪
제4편 역병과 흉년
1장 서울서 온 손님들/ 발병/ 공포의 그림자/ 할미꽃 한 움큼/ 살아남는 자와 죽는 자/ 버선등에 기는 햇살/ 불행한 이성/ 5년만의 귀향/ 흔들리는 민초들/ 뜬구름 같은 행복/ 우관 스님의 하산/ 애기씨가 어서 커야…/ 흉년/ 산송장/ 15장 동무, 까마귀야/
병의 효험이 있기로는 목을 매단 끈이나 새끼줄이 제일이라는 것이 예부터 전해져 내려온 말이었다. 남 먼저 그것을 차지했으니 봉기로서는 대만족이 아닐 수 없다. 함안댁의 염을 끝내고 나온 윤보는 몽달이가 되어 서 있는 살구나무를 쳐다본다. “허허, 인심 좋다, 인심좋아. 삼천갑자 동방석이 되려고 모두 애쓰는구나. 허허허…”5월 중순이 지나서 귀녀는 옥 속에서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여자는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죽었다. 강포수는 귀녀가 낳은 핏덩이를 안고 사라졌다.
한조가 영팔에게 명당을 설명한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묻어 두었던 무덤을 명당인 줄 몰랐지. 수천금을 주고 풍수를 데려다 묘자리를 잡아 놓고 이장을 서둘렀지. 사토장이가 무덤을 파고 무덤 뚜껑을 헤치자 동서리 같은 김이 물씬 올라오지 않았거나? 이때 풍수가 아뿔싸!하며 사토장이 보고 급히 흙을 도로 덮으라 했지. 무덤을 열었으니 정기가 다 날아간 기지.”
흉년의 공포에 한번 사로잡히기만 하면 농민들은 하늘도 땅도 믿지 않았고 다정한 이웃, 핏줄이 얽힌 동기간도 믿지 않는다. 오직 수중에 있는 곡식만 믿는다. 먹이와 직결되는 수성(獸性)이 또한 농민들의 기질인 것을. 좀 더 날이 가물면 농민들의 눈빛은 달라질 것이다. 으르렁거리며 시기하며 언쟁할 것이요 드디어는 괭이나 쇠스랑이 무기로 변하여 피를 흘리게도 되는 것이다. 최참판댁의 농토는 상당히 광범위한 지역에 산재해 있었다. 윤씨 부인은 서희를 데리고 나들이를 결정하였다. 가마 두 틀에 조군이 여섯 명, 김 서방과 삼월이 그리고 개똥이가 함께 가게 되었다. 조준구는 돌아서며 봉순네를 힐끔 쳐다본다. 봉순네도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개같이 충직한 계집이로고.’ ‘개같이 비루한 양반이구마.’
김 훈장이 양자를 얻으려고 혈안이 돼 십촌이 넘는다는 떠돌이 노총각을 찾아서 떠나는 것을 아는 사람은 윤보 말고는 별로 없었다. 요즘 김 훈장에게서 그 나들이는 가을만 되면 도지는 병과 같은 것이었다.
돈을 내고 벼슬을 사다니 망국 풍조야. 뭐 순검 따위 벼슬이랄 것도 없지만 상놈들까지 그 지경으로 놀아나니 어찌 나라가 안 망하겠나. "배고프면 양반이라고 월장 아니하겠소? 하기는 청포 사려! 하고 상놈이 외치면 “내 소금도” 하는 게 양반이지. "사려!" 소리하기가 싫어서 말이오." 나그네는 껄껄 소리를 내어 웃었다.
서울 제물포간 철도만 하더라도 철도를 부설하는 땅을 빌려주었으면 정당한 임대료와 권리금을 떳떳하게 받아야 하거늘 우리 백성들이 돈을 내어 기차라는 것을 탈터인데 세금 한 푼 외인들이 내지 않게 되어 있다 하오. 서울서는 임금이 등극한지 40년 망육순을 겸한 칭경예식도 호열자의 창궐로 연기되었다.
아침이면 봉순이를 거느리고 서희는 윤 씨 부인 상청에 나가 상식을 올리고 곡을 하는데 조준구는 그 곡소리가 질색이었다. 온갖 저주와 최씨 가문을 마지막까지 지키어 나갈 것을 맹세하는 것 같은, 저주와 다짐을 하기 위해 해가 지고 다음 날이 새어 상청에 나가기를 기다린 듯, 처절한 울음이었다. 날로 새롭게 날로 결심을 굳히는 듯, 곡성을 들을 때마다 조준구는 한기를 느끼곤 했다.
주막에 술꾼들이 들어오는 것을 본 용이 영산댁의 말허리를 끊듯이 일어섰다. 그리고 어깨로 바람을 끊듯 나가 버린다.
실의에 빠졌던 이동진을 그 자포에서 구해 준 사람은 러시아 군대의 어용 상인으로 연추에서 막대한 자산을 모은 최재형 그 사람이었다. 이동진은 2년 가까운 기간 최재형 집에 기식하면서 그의 사람 됨을 깊이 관찰할 수 있었는데 이동진 눈에는 아주 희귀한 존재로 비쳤던 것이다. “어윤중 그 양반 아까운 분이었소. 20년이 넘었구먼. 서부 경락사로 있을 때 말이오. 그때 청나라 정부에서 도문강 동북에 있는 사람 조선 사람들을 쫓아내려 했었거든. 그래서 어윤중 그 양반이 종성의 사람 김우식을 시켜서 백두산을 탐색하게 하고 정계비를 찾았는데 비가 있는 곳은 도문강이 아니요 토문강이었더란 말이요. 그 강은 북쪽으로 흘러서 송화강으로 빠지거든. 그러니 청나라 사람들 말문이 막혀 버린 게요.” 일곱 살이 많은 최재형은 그런 말을 하면서 이동진에게 빙그레 웃었다.
"어윤중...백성들한테 맞아 죽다니. 나라에 이득이 된다면 누구하고도 친할 수 있는 그런 사람 아니겠소? 그걸 백성들이 알아야 하는데..." 러시아의 녹을 먹으며 헐벗은 조국에 대한 충성은 이재에 밝은 냉철한 두뇌의 소유자로서 상상하기 어려울만큼 순수한 것이었다. 최재형이 어윤중에 관심을 가지는 까닭도 아마 자신이 가진 양면과 유사한 것을 발견한 때문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