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단장 죽이기>, 2017
보이지 않아도 존재한다고 믿는 것에 대하여
모든 것은 살아내는 사람의 믿음에 달려 있다. 그리고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의 의지와 힘을, 용기를 필요로 한다.
현실을 이루는 모든 구성요소들은 각자가 구축한 세계, 혹은 소속한 세계 안에서 하나의 관념으로 정립되어 기생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간 속에는 현실세계뿐만 아니라 또 다른 세계들, 예컨대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 있다. 따라서 정의 내릴 수 있는 존재들, 예컨대 인간과 동물과 식물들이 이루거나 구축한 현실세계와 정의 내릴 수 없는 모든 '무엇'들이 구축한 혹은 소속한 고유한 세계에서, 각자의 세계의 관점상 '외부의 무엇'이라면 그 존재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관념으로, 하나의 메타포로, 그 세계를 이루는 구성체가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비둘기는 어떤 세계에서는 평화라는 은유로 기능하지만 다른 어떤 세계에서는 천덕꾸러기 처치불가 골칫덩어리의 역할을 맡기도 한다. 하루키는 오랜만에 1인칭 시점으로 화자를 통해, 우리가 현실이라고 명명한, 우리가 발디디고 있는 세계라는 울타리 밖에 '이상한 앨리스의 세계가 진짜로 있다'라고 주장한다. 현현하는 이데아와 전이하는 메타포가 진짜로 있다는 것이다.
하루키는 단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과 작가의 초기작이자 단편과 설정을 같이하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Q84> 그리고 최근 발표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 전반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하여 즐겨 다뤄왔다. 그가 이야기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나 도시는 사실 <로키>가 다루는 같은 타임라인 안에서 분기된 또 다른 시간대, <에브리타임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다루는 다중 우주처럼, 다른 시공간 위에 세워진 물리적인 차원에서의 세계가 아니라 관념적인 차원에서의 세계다. 본질적 자아를 찾는 거대한 실존적 과정에서 인간이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다양한 자아의 공간이다. 그리하여 관념의 영역에 머무는 일일지라도 가슴에서 피를 뿜어내는 기사단장이 '진짜로 있다'. 기사단장 죽이기 속 내가 그의 딸에게 속삭였듯.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한다.
2018. 3. 26. 쓰고 2024. 3. 25. 에 고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