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얼마쯤
[드라이브 마이 카(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 중) - 무라카미 하루키] 우리는 모두 얼마쯤
슬프게도 이제는 더 이상 아니지만. 배우를 꿈꾸는 친구가 있었다. 여러모로 특별하고 실현의 가능성이 낮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장래희망이었지만 나는 그의 꿈을 응원했었다. 다만 그가 나에게 그 꿈을 살며시 고백했을 때, 이유를 묻기는 했다. 왜 그러고 싶은 건데? 그냥. 그렇게라도. 한 번 살아보고 싶어서. 지금도 살아있다는 어쭙잖은 위로를 건넬 수 없어서, 그냥 말없이 술잔을 비웠던 기억이 있다. 그 친구가 그 꿈을 이루었는지, 아니면 아직 그 꿈을 꾸고 있는지, 그도 아니면 꿈을 포기했는지는 애석하게도 알 수 없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더 이상 친구라고 부를 수 없는 사이가 되었고, 그것을 무척이나 신경 쓰고 마음 아파하면서도, 괜찮은 척 연기(펼 연 演, 재주 기 技)하며 모른 척했다. 아마 배우를 꿈꿨던 그는 내 연기를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꽤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니, 살고 있지 않다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조금 알 것 같아졌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우리 삶은 어쩌면 살기 위해서 치르는 긴 값이나 여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산다는 것이 스무 살 초반에는 그저 의식주를 영위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찰나 같은 시간들에 나름의 의미를 쥐어주는 과정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나는 삶이 나는 누구인가는 질문에 대답하는 인간 실존과 일치한다고 믿는다. 인간은 조금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자신의 가치를 올리고자 하지만, 삶을 위해서는 자아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아를 위해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그에 대답하며, 자신이 가진 진짜 자신의 모습과 화해하는 것만이 인간의 실존을 이룩한다. 사회 안에서 누군가 부여한 가치가 아니라 자신의 진짜 의미를 찾는 것은 그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만이 이루어진다. 요컨대 인간이라는 존재의 의미는 그 스스로만이 결정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그 과정에서 인간이 필연적으로 받게 되는 상처와 그 치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의 작품은 항상성(항상 항 恒(마음 心 뻗칠, 걸칠 긍 亘, 즉 마음이 항상 한쪽으로 뻗친다는 의미), 항상 상 常, 성질, 성품 성 性)이 높다. 저마다 조금씩 다른 이야기로 인간이 얼마나 다양한지 이야기하며, 상처도, 각자가 가진 의미도, 얼마나 다양한지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드라이브 마이 카>로 영화화하여 칸영화제 각본상을 비롯한 유수한 영화제에서 수상한 바 있는, 하루키의 <드라이브 마이 카> 역시,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하여,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맺히는 상처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가후쿠(집 가 家, 복 복 福)는 음주운전과 낮아진 시력 때문에 자신의 애마인 노란색 사브 900 컨버터블을 몰아줄 운전기사를 구한다. 그는 신뢰하는 카센터에서 운전 실력이 뛰어나고 과묵하며, 다만 애연가(사랑 애 愛, 연기 연 煙, 家)인 젊은 여성 미사키를 추천받고, 한 번의 테스트를 거쳐 그녀를 고용한다. <기생충>에서 동익(이선균 분)이 기택(송강호 분)을 테스트할 때와는 달리, 가후쿠는 아내가 생전에 앉았던 보조석에 앉아 테스트를 하고, 미사키를 기용한 후로도 보조석에 앉아 출퇴근을 한다. 가후쿠는 연극배우로 현재는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에 출연 중이며, 방송사에도 종종 일을 보러 간다. 두 달 동안 미사키는 조용히 운전하며, 가후쿠가 보조석에 앉아 <바냐 아저씨> 연극 대본을 읽는 것을 가만히 듣는다.
본작은 단조로운 일상이 가만히 이루어지는 노란색 컨버터블 안에서 미사키와 가후쿠의 대화 안에, 액자 형식으로 작은 이야기를 끼워 넣는다. 가후쿠는 ‘아내의 자리’에 앉아 미사키에게 자신이 아내로부터 받았던 상처들을 이야기한다. 자궁암으로 죽은 아내 역시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는 배우였고, 부부관계는 여러모로 아무런 이상이 없었으나 아내가 종종 같이 작품에 출연하는, 주로 연하인 배우들과 혼외관계를 가졌다는 것. 자신은 그 사실을 어느 순간부터 인지했다는 것. 그러면서도 그 이유를 그녀에게 묻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그녀에게 어떤 것도 물어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 미사키 역시 자신이 부모에게 받았던 상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가후쿠와 동갑인 미사키의 아버지는 미사키 모녀를 버리고 떠나버렸다는 것. 미사키의 어머니는 알코올 중독이었고, 술에 취하면 주로 그녀의 외모를 이유로 언어 학대를 자행했다는 것.
주목할만한 점은 가후쿠가 미사키에게 털어놓는 이야기들이, 그가 자기 자신보다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 특히 아내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가 운전기사를 고용하면 보통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뒷좌석에 앉지 않고, 보조석, 그러니까 아내가 앉았던 자리에 앉는 것이 그가 아내를 떠나보내고 오랜 후에도 여전히, 그녀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을 삶의 중심에 두고 있음을 은유한다. 심지어 그는 아내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잤던 정부(뜻 정 情, 사내 부 夫), 배우 다카쓰키와 친구로 지내기까지 한다. 가후쿠는 미사키에게 다카쓰키와 도쿄의 술집에서 회동하며 죽은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던 날들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분노를 해소하기 위한 방책으로 어떤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 벌인 일이긴 했지만 복수심 때문은 아니었고, 다만 어느 순간부터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더 이상 친구로 지내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오로지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를 만나지만, 그가 생각보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더 이상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에 그가 도움이 되지 않자 뚜렷한 이유는 모르는 채로 교우관계를 끊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카쓰키가 남긴 말이, 세월이 지나도 떠오를 정도로 생생하게 남는다. 아무리 잘 안다고 생각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타인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본다는 건 불가능한 얘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나 자신의 마음과 솔직하게 타협하는 것 아닐까요? 진정으로 타인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나 자신을 깊숙이 정면으로 응시할 수밖에 없어요. (p. 51)
어떤 사건을 겪으면 인간은 사건 이전의 인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가후쿠가 가정(家)의 평화(福)를 지키기 위해서, 아내에게 꼭 물어야 할 말을 연기(끝 연 延, 기약할 기 期)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는 아내의 외도를 이야기하는 순간, 아내와 자신의 관계가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두려워했고, 묻기보다 차라리 연기하기를 택했으며, 따라서 괜찮은 척 여전히 연기하면서 살아왔던 셈이다. 가후쿠는, 다카쓰키와 마지막 만남에서 그의 눈에 진심이 있음을 읽고, 그의 말처럼 가후쿠와 다카쓰키 모두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상대방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는 맹점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완전히 알지 못한다는 사실도. 그러니까 가후쿠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카쓰키도 아내의 일부일지라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같으며, 따라서 다카쓰키를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그를 통해 그녀를 이해한다는 시도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에 대하여 이해한다. 그리고 더 이상 연기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다카쓰키 역시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했음을 알았기 때문에, 가후쿠는 그와의 관계를 정리한다.
그녀가 살아있을 때 물어야 했다. 그녀가 죽으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산산이 조각날 줄 알았더라면. 그가 자신의 진심을 들여다보지 않았던 순간부터 그는 한걸음도 나아오지 못했고, 한순간도 자기 자신으로 살아내지 못한 것이다. 어쩌면 가후쿠는 자신이 미사키의 아버지와 동갑일뿐더러, 그녀가 자신의 죽은 딸이 만약 살아있다면 그녀와 동갑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녀에 대한 감정이 달라짐을 느끼면서 자신이 스스로 내일을 유예해 버린 과거에 갇혀 한걸음도 나아오지 못했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가후쿠가 미사키에게 닫힌 컨버터블에서의 흡연을 허락하는 것은 그가 그동안 정해놨던 룰을, 그리고 유예해 왔던 어떤 시간들을, 한꺼번에 재정립하고 살아내는 것을 상징한다. 연기(延期)와 연기(演技)가 공교롭게 같은 발음을 공유한다는 사실은 이 지점에서 의미심장한 것이 된다. 가후쿠는 연기를 펼치며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답함으로써 아내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는 시점을 연기함과 동시에, 아내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연기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실제로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연기해야 했다.
미사키는 산뜻하게 말한다. 가후쿠의 아내가 네 명의 남자들과 잔 것은 아마 사랑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그것은 일종의 병 같은 것일 뿐이고, 그것을 가후쿠가 아무리 궁리한다고 한들 답은 얻을 수 없으며, 다만 혼자 굴려보다가 꿀꺽 삼키고 그냥 살아가는 수밖에는 없다고. 가후쿠는 미사키가 사는 것 자체가 명줄 줄이는 것이라고 말한 것에 그것도 하나의 견해라고 평했던 것처럼, 이 또한 하나의 견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자신이 보내온 터널 같은 시간들에 대한 위로를 받는다. 닿을 수 없는 것에 닿기 위해 갇혀 있어야 했던 찰나들이 의미 없이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중요한 것을 들여다봄으로써 나를 깊숙이 정면으로 응시했던 시간으로 남아 고요히 그의 망막에 내려앉는다. 그의 시력에는 결손이 생겼지만, 비로소 그는 더 많은 것을 보게 되었다. 조금 더 우리는 모두 연기를 한다. 연기가 끝나고 막이 내리면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지만, 예전의 그 위치는 아니다. 괜찮은 척하면서, 자기 자신을 애써 외면하면서, 대본도 없이, 작가의 의도도 모르는 상태로. 가후쿠는 악조건 속에서도 혼신의 힘을 다하여 긴 시간 해왔던 연기가 끝나고, 원래의 위치에서 벗어난 자기 자신으로 비로소 돌아온다. 그러니 그 오랜 막의 시간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돌아온 자기 자신에게도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2015년에 본 소설집이 발표되었을 때, 이해하지 못하거나 공감하지 못한 이야기들에 그때보다 조금이라도 더 가닿을 수 있다는 점에서, 연기가 끝나고, 무의미해 보이는 시간이 지나도, 내 위치는 조금이나마 달라져 있다는 착점이 남다르게 다가온다. 누군가가 말없이 떠나고 혹은 너무 많은 말을 남기고 떠나고, 그 시간을 괜찮은 척 혹은 슬퍼하는 척 연기하면서 보낸 시절이, 나를 아무리 잘 가까운 사람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조금 더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왔다. 작품과 헤어져 있는 순간 내가 누구인지 자주, 오래, 애써 깊숙이 들여다보기도 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도, 그리고 그 일부라도. 진정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는 슬픈 사실을 이제는 조금 이해한다. 말없이 멀어진 그 친구가 자신의 의미를 살아보고 있기를 기도한다. 나를 떠났던 수많은 뒷모습들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저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내게 등 돌린 그 모습 뒤에도 행복하기를 빈다. 그 우주 또한 자신 속을 들여다봄으로 인하여 빈틈없이, 진정으로 괜찮기를. 그리고 그들이 어설픈 내 연기를, 솔직하지 못하고 연기했다는 사실마저도, 용서하기를.
우리는 모두 얼마쯤, 연기를 하며 산다. 그러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속을 들여다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알지 못해 연기로 메워야 하는 부분들을 말없이 안은 채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노란색 사브가 수많은 이야기를 가득 싣고도, 기어를 변속하는 소리 한 움큼도 내지 않고, 숨죽여 앞으로 내달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