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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녘 연필소리 Mar 11. 2024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2013, 회색이 없으면 안 되는 이유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무라카미 하루키] 회색이 없으면 안 되는 이유


무지개를 마지막으로 본 일이 언제였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어릴 때는 무지개를 자주 봤던 것 같다. 무지개를 볼 때마다 빨강, 주황 사이에 이름 없는, 아니 이름 모를 색깔들의 이름은 무얼까 생각했다. 얼마나 외로울까도. 빨강과 주황이 함께 무지개를 색칠할 수 있도록 온 살을 맞대어 둘 사이를 버티는 그 색채들을 응원했었다. 시간이 지나 엄마의 손을 놓고 무지개가 걸려 있던 산 너머로 세상 밖으로 나와 혼자 살면서 이 땅 위의 모든 존재들은 서로 다르고 같은 면을 디디고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누구 하나 경계에 서있지 않은 존재가 없다는 것을 배웠다. 언제부터인가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비가 개면 말간 햇살 아래로 수천 년 동안 떠오르던 빨강과 주황 사이의 색깔들이, 아름답다고 탄성을 내뱉으며 손끝으로 무지개를 가리키고 빨주노초파남보하고 색깔을 헤아리는 그 손끝에 베어 아린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이런 생각을 했을 것 같다고. 아 나는 이대로 이름이 불리지 않아도 좋아. 아 나는 이대로 무지개를 대표하는 색깔이 되지 않아도 좋아. 이 빛깔로 이렇게 빛나는 것이, 나니까. 하고.



나는 책을 무척 아끼는 사람이다. 책이 낡는 것이 싫어서 하드커버 양장본을 사고, 가끔은 겉표지를 고시생 시절 쓰던 수험서처럼 비닐로 동여매기도 한다. 그래서 어지간히 패키지가 의미 있고 아름답지 않은 이상, 혹은 새로 번역된 결과가 궁금하지 않은 이상 소장한 작품을 재구매할 일도 없다. 특히나 애정하는 하루키의 작품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두세 달 된 것 같은데, 훌륭한 인사이트를 자주 나눠 주는 영화 크리에이터 친구와 얘기하다가 다자키 쓰쿠루의 '무색채'를 유머러스하게 사용하기에 2013년 국내 출간되어 두세 번 읽은 후로 안 읽은 지 오래된 이 작품이 생각나서 책장을 뒤지다 깜짝 놀랐다. 내 생애 그렇게 너덜너덜한 책은 없었던 것 같다. 교수저 기본서도 그렇게 더럽게 본 적이 없다. 책은 온통 접히고, 좋은 구절이라고 북마크가 되어 있었다. 온통 좋은 구절, 간직하고 싶은 구절을 표시하느라 접고, 포스트잇을 붙여서 지저분해졌다. 덕분에 새롭게 출간된 버전의 본작을 구매 했다.


본작은 그런 작품이다. 마킹하지 않을 곳이 별로 없는 작품. 허투루 넘어갈 구석이 별로 없는 작품. 본작은 하루키 월드에서 수필과 단편 소설들을 제외하고는 짧은 편에 속하는 분량이지만 온통 하루키 월드를 관통하는 기본 정서, 이해와 치유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리고 하루키 작품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익숙해져도 겨우 알아차릴만한 은근한 메타포가 전반적으로 깔려 있어 작가의 작품관을 사랑하는 독자 입장에서는 작가의 고유 언어로 쓰인 작품을 선물 받은 것처럼 느낄만한 부분이 많다. 전작들, 특히 <노르웨이의 숲>, <1Q84>, <해변의 카프카>의 기시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 다자키 쓰쿠루 캐릭터 자체와, 그가 세상과 맺는 관계가 그간의 하루키 작품을 관통한 주된 정서와 메타포를 상당히 많이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름부터 색채가 느껴지지 않는 인물 다자키 쓰쿠루는 이름만큼이나 자기 자신에게는 뚜렷한 색채가 없고 창조자의 자질이 없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다. 삶의 전부나 다름없었던 친구 무리에서 이유도 듣지 못한 채 추방당하면서도, 추방 이후 삶이 송두리째 흔들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면서도, 그는 수동적으로 상황을 겪을 뿐 상황에 대응하지 못한다. 작은 규모임에도 공동체 속에 있을 때도 온건하고 수동적이었던 그는, 몇 년이 지나도 그 상처를 잊지 못하고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저항 한 톨 없이 정해진 것처럼 시들어간다. 그러다 강렬하고 깔끔한 색채를 가진 여성과 교제하게 되고, 그녀의 권유로 공동체 일원들을 찾아 그들에게서 자신을 추방한 이유를 듣는, 파국의 전말을 확인하기 위한, 그리고 사과할 일이 있다면 사과를 전하기 위한 순례를 떠나게 된다.


순례길을 통해 다자키 쓰쿠루는 겉보기에 조화로워 보여도 다름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지 않는 연대가 얼마나 툭하고 끊어지기 쉬운지, 뚜렷하고 눈에 띄지 않는 색깔도 이름이 있고, 특질이 있으며, 그 특질이 다채로운 팔레트에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이름 모를 꽃들이 아름다운 들녘에 얼마나 필요한지, 스스로 색깔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가 다른 사람 눈에는 얼마나 또렷한 색이었는지, 그리고 빽빽한 색채들이 그 헐거운 색감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를 확인한다. 다자키 쓰쿠루는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받은 상처가 무엇인지, 자신을 상처 입게 한 손끝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치유받는다. 삶이 늘 그렇듯이 타인을 완전히는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치유 너머에 불가해한 미스터리가 가라앉지만, 그는 허리 숙여 바닥으로 가라앉는 비밀 조각을 붙잡기보다 세월이 지나도 휩쓸려 사라져 버리지 않는 것들을 그러모아 품에 안는다.


나는 어둠의 필요성을 빛의 존재로 설명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저 존재는 그 자체로 타당성을 입증한다. 회색빛 그림자가 없으면 우리는 완전하지 않다. 영혼을 빼앗긴 어부, 마음을 갖지 못한 어부의 그림자가 그랬듯이. 존재와 존재가 연약한 고리로 묶여 느슨한 연대를 완성하고 비로소 단순히 존재함을 넘어 완전해진다. 그저 그뿐이다.


우리는 각자 다른 궤적을 그리는 포물선이다. 단숨에 이름 붙이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어떤 색깔들이다. 누군가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특성 중에 가장 도드라지고 분류하기 쉬운 어떤 특성만으로 순식간에 존재를 정의하는 것만큼, 존재를 설명하기에 편리한 방법이 없다. 폭력은 늘 손쉬운 방법을 선택하는 게으른 자들의 손끝에서 자란다. 그 손끝이 포물선이 달리고 싶지 않은 궤적을 달리게 하고, 색깔이 경계에 선채 갈가리 찢기게 한다.

세상에 필요하지 않은 색깔은 없다. 이해받지 못할 마음은 없다. 띠링 띠링. 다음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2022. 1. 7. 에 쓰고, 2024. 3. 11. 에 고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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