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예쁘다, 예쁘다 하면 그 대상이 예뻐진다고 했다. 예뻐 보이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예뻐진다고. 어쩌면 무의식은 실존에 영향을 미친다. 어쩌면 실제로 그 형태를 바꾸기도 한다. 야이. 너 이 xx oo 완전 꼰꼰대네. 아 선배님, 저 꼰꼰대는 맞는데요. 후배한테 xx, oo가 뭐예요? 교양 없게. 아니 그리고 그 xx가 남자 선배랑 여자 선배 대하는 태도가 서로 다른 것이 문제지, 내가 선배라고 무조건 대우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니까? 나보다 나이 많아도 후배니까 무조건 군기 잡겠다. 뭐 그런 마음이 아니라니까요? 오랜만에 만난 선배가 내 눈을 빤히 보더니. 많이 세졌네. 막둥이 놈이. 하면서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다. 웃을 문제가 아니라면서 쌜쭉이다가 그를 따라 웃었다. 내가 권위 중심적으로 사고하는 진정한 꼰대라면, 그에게 대들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후배에게는 권위적으로 행동하고 선배에게는 대드는 내로남불형 인간이거나. 후자에 해당한다면 아마 갱생이 불가능할 테지만, 어쩌면 나는 아직 진짜 꼰대는 아닐지도 모른다. 보수적인 직장 문화를 가진 회사에 입사하면서 제일 경계했던 것이 권위주의에 물드는 일이었다. 경제학과 법학을 복수 전공하면서, 경제학보다는 법학에, 법 중에서도 공법에, 그리고 옛날 판례에도 동기화가 잘 되는 스스로를 보면서 늘 불길했다. 이게 왜 술술 이해가 되지. 영감님들처럼 꼰대가 되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나이가 든다고 다 꼰대가 되는 것이 아닌데도, 어느 순간부터 나이 드는 일이 두려워졌다. 더 나이 들면 머리와 마음에도 녹이 슬어서, 서류를 복사하고 있는데 지나가는 선배가 보고, 설수사, 치마가 쫌 짧다? 인사 안 해? 해서 기분 나빠했던 것도 잊고, A수사, 치마가 너무 짧은 거 아니야? 고개는 뒀다 뭐 하니? 하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꼰꼰대가 될 것만 같았다.
예전보다 훨씬 나아지긴 했지만, 권위(권세 권權, 위엄, 세력 위威) 중심으로 운영되는 경직적 조직 문화 때문에 타인의 자유를 제재하는 현상이 아직도 많은 환경 속에서 내가 나로 남아 있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떤 사람으로 남고 싶은지, 스스로 계속 묻는 일이었다. 존재는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스스로에게 '나는 무엇인가'를 자문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주체적으로 확인한다. 그리고 그것이 실존이다. 꼰대가 되고 싶지 않다는 소박한 바람은 실존(實存)과 맞닿아 있었다. 아니, 늘 그렇듯이 실존(實存)은 이 소박한 다짐을 포함한, 우리 삶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생은 본질적 자아와의 합일을 위한 긴 과정이다. 나는 누구인가. 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평생을 읽고 쓰고 생각한다. 생각보다 삶은 친절해서, 이 긴 과정 속에서 그 주인공이 지칠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지, 잊지 마. 네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해야 해. 하고 불쑥불쑥 이정표를 내밀기도 한다. 계산대 앞에 서서도 끈질기게 꼰대라고 놀리는 선배를 두고, 먼저 더위 속으로 나오면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다시 생각했다. 죽으면 원자로 흩어질 확고부동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존재들이 가여워 아찔했다. 뒤따라온 선배가 어깨를 붙잡으며 야. 괜찮냐. 더위 조심해라. 나이 들면 훅 가. 같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이따금 수심이 두터운 심연의 끝에 누워 연못만큼이나 두껍게 배를 깐 안개가 드리워진 수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들 때가 있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엄마는 안개가 많이 끼는 날이면, "오늘 낮에는 날씨가 좋겠구나. 조금 덥겠어." 하면서 나의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묶어주시거나 날이 더워지면 겉옷을 벗고 뛰놀 수 있도록 안에 얇은 옷을 입히고 '잠바'를 입혀주셨는데 나는 늘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안개가 걷히지 않을 것만 같아서. 실제로는 늘 엄마 말씀처럼 날씨가 좋았다.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아침에 안개가 끼면 '날씨가 좋겠구나.'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안개가 영원히 걷히지 않을까 봐 걱정한다.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안개에 가려 햇빛 한 점도 들지 않은 심연 속에 있는 날이면, 그 어둠의 끝에 등을 대고 누워 아무도 듣지 못하는 울음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하도록, 흑흑하고 낸다.
새벽녘에 안개와 서리가 내리는 감각 속에 잠기는 그런 날이면 김승옥 선생님의 <무진기행>이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읽는다. 김승옥 선생님은 신문사에 소설을 연재하다가 중단, 생계유지를 위해 영화 각본에 열중해서 소설을 쓰지 못함, 이어령 선생님께서 호텔을 잡아주고 밥값까지 내줘도 부담감을 이유로 도망, 이후 또다시 이어령 선생님께서 신문사 편집자와 관계자를 보조자 명목으로 사실은 감시자로 두고자 김승옥 선생님의 옆방에 숙박시키면서 두 개의 방 값을 지불하면서 지원했지만 이미 한편으로도 완성형 소설을 써내버려 장편 계획이었던 작품을 더 이상 진전시키지 못해 단편으로 만족하고 작전 중단, 같은 이유로 주로 단편들을 써내셨고, 그 후로 신실한 기독교인으로의 삶에 몰두하고 작품을 내고 계시지 않고 있다. 때문에, 대표작 <무진기행>을 포함한 모든 단편들은 아껴 읽혀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그럼에도 아침에 안개가 끼는 날씨가 되면 어김없이 작품에 손이 가니 조절할 수 없는 마음이 참 이상하다. 장편인 <해변의 카프카>는 <무진기행>보다 더 긴 분량만큼, 더 오랫동안 곁에 남아 위로를 건넨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관을 이루는 본질은, 인간의 실존을 향한 몸부림과 그 고단한 과정을 묵묵한 응원으로 위로하고 치유하는 과정이다.
<노르웨이의 숲>은 이런 하루키 월드를 이루는 작품들에게 내내 큰 영향을 미쳐왔다. 쿨하고 터프한 와타나베는 <해변의 카프카>의 카프카를 닮았다. 요양 목적의 비영리 단체이자 코뮌 재질의 공동체인 요양소, 밤과 꿈, 그리고 달빛을 등 삼아 나타나는 비현실적인 모습의 나체를 한 소녀는 모두 <1Q84>의 설정을 연상하게 한다. 기차와 기차역에 대한 관념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도쿄에 대한 단상은 <언더그라운드>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떠오르게 한다. 이외에도 누군가에게는 성행위 자체가 치유라는 설정이나, 나오코의 처녀성, 치유의 유예, 죽었기에 그 나이에 멈춰 자라지 못하는 영혼들, 비틀즈, 영혼의 고독,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와 같은 단상들이 장편뿐만 아니라 다른 중, 단편들에서도 자주 드러난다. 우리는 매일 이별하고 잃어버리고 있다. 서른이었던 나와, 서른하나였던 그와, 서른둘이었던 그녀와. 오늘보다 더 소년이었던 어제의 나와. 어제, 살아남기 위해 대가를 치르거나, 대가를 치르지 않고 슬쩍 빚을 지거나, 무언가를 잃거나, 잃지 않기 위해 슬쩍 주머니에 그것을 숨겨버린 우리 모두는. 오늘, 어제와는 어딘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제보다 오늘 더 어른이 된 하루키가 영원히 소년일 수 있는 이유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영원히 자라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계속 비슷한 이야기를 하며, 끊임없이 위로를 건네고 있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는 의지와 무관하게 형성된 무의식의 영역에서도 인간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그 가혹한 행위와 결과의 고리 안에서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고자 함으로써 무의식보다 더 견고하고 운명보다 더 우월한 존재로 실존을 이룩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터프해지고 싶은 소년 다무라 카프카는 자신 안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따라 가출을 감행한다. 그는 십 대 소년이 견디기 어려운 일들을 겪으며 여정 끝에 바다에 닿는다. 사실 이 여정은 소년이 의도하거나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의 본질적 자아,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고 실존을 이룩하기 위한 과정을 비유한다. 그리고 그 여정 끝에 닿은 바다는 그의 무의식과 꿈, 욕망과 소망의 총체다. 본작의 다른 주인공 나카타는 지적 장애인으로 분류되어 국가의 보조금을 받고 있다. 그는 바다에 대해서 심해에 맛있는 물고기들이 산다는 점, 바닷물은 몹시나 짜다는 점 정도밖에 알지 못한다. 그는 어렸을 때 전쟁에 상처받은 미망인의 무의식이 휘두른 폭력에 상처받아 지적 능력을 잃어버렸고 대신 고양이와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지만, 바다를 식별할 뿐이지 바다에 대하여 이해하지는 못하는 그림자 같은 존재로 자란다. 이 거대한 은유에 따르면 카프카 앞에 놓인 이 바다는 무의식이고, 끈적한 밀물은 무의식 밖으로 비죽 비져 나와 우리가 디디고 사는 이 현실에 종종 넘실 거리는 꿈, 욕망과 소망의 복합체다. 동시에 지식과 지혜, 의식의 총체이자 직관으로 현출 되는 영역이기도 하다.
본작은 독자에게 아버지의 예언을 피하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최대한 멀리 도망간 카프카가 사실은 예언 가까이 다가가고야 말았던 것이 필연일지라도, 운명 속에서 그저 부스스 그 지독한 농담에 웃어주지 말자고 이야기한다. 주인공의 이름을 카프카로 정한 이유는 아마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스스로 정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비로소 실존한다는 프란츠 카프카식 실존주의에 대한 헌사일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용감함과 정직함을 탓하고 스스로 장님이 되어버리는 오이디푸스로 기록되지 말자. 우리는 운명 속에서 천천히 일어나 겸허히 자신의 무의식이 저지른 실수를 인정하고 조국의 전장을 지키는 오이디푸스로 기록되자. 어머니이자 소녀는 림보에서 만난 아들이자 연인에게 말한다. "날 기억해 줘." 평생 제대로 누군가 사랑해 본 적 없는 청년은 함께 입구의 돌을 열고 닫았던 노인을 사랑하게 됐다. 그는 노인의 입을 통해 경계 너머로 건너가 현실 세계를 훼손하려는 괴물에게 망설임 없이 도끼를 휘두른다. 사랑했던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까지 지키려고 했던 것을 지킴으로써 그는 미션의 승계자가 되고, 사랑을 완성한다. 아마도 소년과 청년은 떠난 어머니를, 연인을, 할아버지를, 멘토를, 마음속에 빠짐없이 기록하고 영원히 간직할 것이다. 기록한다는 것만큼 중요하고 낭만적인 일은 별로 없다. 꿈의 시간이 떠나고 눈을 뜨면 어김없이 현실 세계에 편입된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억만은, 기록만은 남아 경계 위에서 만났던 해변 위에 부는 바람과 발등을 적시는 물방울을 기억하게 하리라. 본 작은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환상(꿈),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 선택과 다른 선택, 실화와 신화, 용서와 복수, 희미한 그림자와 또렷한 그림자, 굳건한 경계와 희미한 철책을 사이에 둔 모든 양립불가능하지만 양립하는 것들의 관계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우리는 모두 그 칼끝처럼 얇은 경계 위에 선 사람들이며, 잊지 않고 기억함으로써 낙조와 창조가 끊임없이 교차하는 이 바다에서 원하는 방향을 향해 조금씩. 나아갈 수 있다.
또한 본작은 꿈이나 무의식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휘두르는 폭력, 인간 본성 속에서 숨어 있는 폭력성,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는 인간들이 하는 실수 같은, 평범한 삶 속에서는 실체 하지 않는 것들이 특정한 동기를 만나 행위화 되고, 타인을 상처 입힐 수 있다는 사실을 인간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되며, 나아가 그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연대와 사랑으로 서로를 보살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오시마의 말처럼. 사랑은 세계를 다시 세워가는 일이니까, 사랑이란 어떤 일이든지 일어나게 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내면을 이루는 바다를 들여다보고, 무의식과 운명에 지지 않도록, 자신의 본질적 자아를 발견하고 안아주고 화해하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상처는 상처를 낳는다. 상처를 입힌 자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벌어진 일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휘두른 폭력이 낳은 처참한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억울하다, 가혹하다 느낄지라도. 폭력이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일맥상통한다. 무의식이 휘두르는 폭력에 스스로 굴복하거나, 책임지지 않는 것은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다. 산다는 것은 지독하게 폭력적인 세계와 매일 마주하고, 가끔은 속절없이 다치고야 마는 일이다. 카산드라의 예언은 그것을 믿는 이의 시간 안에서는 빗나가지 않는다. 이 길 끝에 예언은 스핑크스처럼, 보란 듯이 길을 막고 앉아 혀를 날름거릴 것이다. 스핑크스가 내는 퀴즈를 맞히지 못하면 죽는다. 그리고 이 운명과 상관없는 수많은 이들도 죽는다. 그녀가 내는 퀴즈를 맞히고 스핑크스가 절벽 아래로 몸을 내던지고 나면 비극적 예언은 이루어지고 만다.
무의식과 현실의 경계 속에서 잔인한 아이러니는 늘 퍼런 서슬을 밖에 내놓고 줄타기하는 모두를 쳐다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간밤에 누군가 꾼 꿈이 우리를 해하고, 우리가 새벽 선잠에 꾼 꿈이 누군가를 해하고야 마는, 폭력적인 세계의 일원이고 그것이 우리의 운명일지라도, 이대로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다. 미질 때문에 아이러니에 빠져 스스로 장님이 된 왕을, 그저 더럽다, 비인간적이다 기록할 것인가. 아이러니는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단단하게 하고 세상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하는 기회가 된다. 아이러니는 누군가에게는 비극이다. 운명은 모두에게 다르게 오고, 모두는 운명을 다르게 대한다. 바다 위의 모두는 각자 다른 파도를 맞고, 그 드센 파고 위에 다른 모양으로 선다. 선택은 파고 위에 선 카프카의 몫이다.
다무라 카프카는 세상에서 가장 열다섯이 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터프한 카프카가 되기 위해, 폭주하는 음계를 가득 싣고 굽이진 산골 길을 빨간 스포츠카로 바람처럼 달린다. 깊은 숲 속 홀로 선 통나무 집에서 까만 밤을 보내고, 발이 폭폭 빠지는 해변을 건너, 바다의 끝과 세상의 끝이 만나는 지점에 선다. 그는 파도치는 무의식과 발 딛고 선 의식이 만든 가느다란 경계 위에 서서, 타고 태어난 (오이디푸스적) 예언을 받아들이면서도 주체적인 선택으로 자신의 운명을 폐기한다. 이 얇은 글자들이 내 손으로 폐기한 나의 운명 그리고 타고 태어난 예언이자, 내 손으로 선택한 숙명이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새벽녘 종이에 영글어 맺힌 잉크와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가 내가 엮은 진언이자, 뛰어넘을 업보라고 생각하면, 삶의 모순이 얄궂으면서도 설렌다. 나는 카프카처럼 터프해지는 여행 중에 있다. 깊은 숲 속과 도서관을 가로지르는 여행 대신, 읽고 쓰면서. 그래서 나는 매일 같이 읽고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녹슬고 있다. 부디 녹슬지 않기를 그렇게 원했건만. 별빛에, 바람에, 파도에, 눈물에. 시시각각 녹슬고 있다. 세월이 마음에도, 머리에도, 눈가에도, 자꾸 세월의 흔적을 그려 넣는다. 그러나 나는 녹슨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나의 기준을 다른 이에게 강요하지 않는 사람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용기는 폭력적인 무의식에 맞서는 비비탄 총구가 된다. 나는 나와 다른 이를 혐오하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나와 다른 이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클라라와 태양>, <작별인사>, <천 개의 파랑>, <완다비전>, <수브다니의 여름휴가>와 같은 작품들을 되돌아보면, 최근의 작품들은 실존이 비단 인간만이 고민할 문제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고 있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는, 나는 누구인가. 에 대답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의미를 규정하고, 실존한다.
그러므로 다시. 나는 실존하는 존재다. 나는 사랑을 위해 기꺼이 붕괴를 선택하는 존재다. 해변의 끝에 서서 눈을 질끈 감고. 내가 녹슬고 있음을 인정하기로 한다. 다음에 선배를 만나면 꼰꼰대라고 놀릴 그에게 그래요, 나 꼰대야. 나 녹슬고 있어. A가 남자 선배한테는 인사하고 나는 먼저 인사해도 안 받아준단 말이야. 그래서 A한테 왜 나한테는 인사 안 해줘요? 물어본 것이 꼰대짓이라면 그래. 나 꼰대 할게요. 됐어요? 하고 속사포처럼 쏟아낼 거다. 누가 설나래는 무엇인가. 에 어떻게 대답하더라도 그에 상관없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운 내 존재는 아직 괜찮다. 실존은 실존의 주인의 대답에 의존한다. 녹슬어 가는 것도 퍽 괜찮다. 녹슨다고 '진짜 나'는 달라질 리 없으니 말이다. 작열하는 햇빛과 짭조름한 파도를 온몸으로 맞으며. 묻는다. 나는 누구인지. 갑자기 이 긴 길이 꼭 여름휴가를 떠나는 해안도로인 것만 같다.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떠난 길 위에 있다. 무의식과 의식의 가느다란 경계 위에서 책임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인간은 시간 앞에 무력하지만 그 무상함을 알면서도 무위를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시간보다 위대해진다. 잠이 깨어 뒤척여도 잠들 수 없는 새벽, 베란다 밖에 안개가 가득하다. 나는 녹슬고 있다. 그러나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터프하다.
2020년 7월, 2020년 10월에 쓴 짧은 기록들을 한편에 엮다.
처음부터 한 편의 글이 아니었기 때문에 맘에 들지 않는 구석이 많지만, 지금보다 어린 날의 어린 감상이 어쩐지 감회가 새로워서 폐기하지 않고 올리다.
그 글에 2024년 2월, 3년 4개월 동안 <해변의 카프카>에 대하여 언급하였던 글들과 짤막한 단상들을 덧붙여 다시 쓰다.
역시 처음부터 한 편의 글이 아닌 글들을 한편으로 엮어냈기에 아쉬운 부분이 많지만, <해변의 카프카>를 읽고 또 기억했던 순간들의 기록이기에 퇴고를 거치지 않고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