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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녘 연필소리 Feb 19. 2024

<노르웨이의 숲>, 1987

살자, 오늘을

[노르웨이의 숲 - 무라카미 하루키] 살자, 오늘을


요즘 종종 집에 셋째가 놀러 온다. 22살, 그야말로 청춘이 양볼 가득 발그스레하게 물든 그 아이는 대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있다. 서울에서 내려와 지내면서 11살 터울 때문에 어색했던 이 애와 가깝게 지내고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되었다. 애기인 줄만 알았던 동생은 가끔 나를 울리거나 충격에 빠트리고는 하는데, 지난해 말인가에 놀러 올 때부터는 언니가 읽는 책이 읽고 싶다며 한 권씩 빼 읽거나, 치킨 뜯던 손가락으로 책장을 가리키며 저건 뭔 책이야 물어본다거나 하는 게 그런 일들이다. 그날도 치킨인지 마라탕인지를 먹고 있는데 힐끔 책상 위를 보더니 양자오의 <영원한 소년의 정신 : 하루키 읽는 법>을 발견하고는 "언니는 저 사람, 하루키 정말 좋아하나 봐." 했다. "응, 하루키 알아?" 했더니, 그 애는 "응, 노르웨이의 숲. 상실의 시대. 상실의 시대가 더 잘 지은 제목 같아."라고 무심코 대답했다. 심장 소리가 그 애 귀에 들릴까 봐 부여잡고 "어땠어?" 묻자, "애들은 그게 야한 내용이라서 돌려보기도 해. 나는 솔직히 너무 어려웠어.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아. 그런데 친구 한 명은 그게 인생 책이라면서 맨날 자랑스럽게 들고 다녔어. 나도 언젠가는 이해하겠지."하고 또 시크하게 답했다. "하루키 정신의 기본은 위로고, 치유야." 했더니, 그 애는 또 "응, 그런 것 같기도 하네." 했다.



그 솔직한 감상평 앞에서 마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 애가 배우고 있는 프랑스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하루키 문학이 청춘에게 어필하고 상처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이유는 'Quelque chose' 때문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 감정이다. 작가가 왜 이런 내용을 넣었는지, 의도가 무엇인지, 공부하듯 해체해서 파악하지 않아도, 읽고만 있어도 Quelque chose 덕분에 독자는 인물이 서로를 치유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 영향으로 자신도 치유를 받는다. 하루키에 따르면 세상은 거대한 은유이긴 하지만, 그뿐이다. 이 은유를 해석해서, 의미를 파악하고, 그로부터 치유를 이루고, 성장으로 나아갈 필요가 없다. 그저 우리는 은유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은유일 뿐이다. 그저 다른 은유들과 공존할 뿐이다. 물론, 메타포 덩어리로 이루어진 작품을 해제하고 더 작은 단위의 메타포 하나하나의 의미를 나름대로 찾아보고 해석해 보는 것 또한 하루키 문학의 큰 매력이지만, 요는 꼭 그리하지 않아도 그와 그의 작품 속에 있는 인물들의 따뜻한 위로를, 수고했다는 토닥임을,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내버려 둠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상실하지 않으면,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공평하고도 잔인한 세상을 살아내고 있다. 요컨대 상실의 시대다. 대가는 무겁고, 상처는 오래갈 것이다. 비슷한 상실을 반복해서 겪어도 어떤 상실은 적응돼서 덜 슬프다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매 순간이 새로운 상처고, 눈물일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 아픔에 대해 나약하다고 비난할 수 없다. 상실의 시대고 아픈 것은 당연한 것이니까 괜찮다고 어리석은 위로를 건넬 수도 없다(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은 다시 생각해도 희대의 개소리다). 아침에 욕조에서 깨어나 혼자 앉아 있어도, 새는 날아가 버렸어도, Norwegian wood는 좋고, 남 속도 모르고 잘만 탄다. Norwegian woods는 여전히 뾰족뾰족, 연약하지만, 울창하다. 죽음은 우리 삶 속에 잠겨 있고,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은 치유될 수 없으며, 상처는 여전히 쓰리지만, 세상은 무심히, 묵묵히 전진한다. 쓰린 상처를 부여잡고 선홍색 피를 뚝뚝 흘리며, 미도리와 통화하던 와타나베는 물음표로 침잠한다. 나는 어디에 있지? 우리는 지금 거대한 메타포 속 어디쯤에 닿았을까. 눈앞이 희뿌옇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살아 있고, 살아가는 것만을 생각해야 한다. 아프면 아픈 채로. 아프다고 인정하고, 붕대 감은 채로. 시대는 흐르고 있다.

 


내가 아직 중학생일 때, 그러니까 강산이 한차례 뒤집어지기도 전에 마지막으로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지금까지 다시 읽은 적이 없다. 물론 그때보다 지금의 내 모습이 크게 달라지지는 못했지만, 어린 나는 말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한 작품을 좋아했다. 작가의 의도가 딱 떨어지게 인식되는 기분이 좋았다. 메타포를 해제하여 글로 풀어 옮기는 것을 좋아했다. <노르웨이의 숲>은 다른 작품에 비해 작가의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대사로 말해오는 캐릭터가 많아서 편하긴 하지만, 반대로 그 대사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다른 작품보다 훨씬 모호하다. 그래서 하루키의 에세이집, 잡문집까지 찾아 읽으면서도 <노르웨이의 숲>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작년 이맘때쯤 <반딧불이>를 통해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만나면서, 정해진 수순처럼 작품을 다시 만났다. <반딧불이>는 상실의 시대의 앞부분을 이루는 단편이다. 그러니까 작가가 반딧불이를 쓰고 나서, 이야기에서 못내 아쉬움을 느꼈고, 결국 단편을 늘리고, 살을 덧붙이고, 세계 한가운데에 우물을 갖다 놓기도 하면서, 상실의 시대를 완성하게 된 것이다. 나이가 들었는지, 그동안 나도 인생을 살아내기 위해서 치른 상실이 쌓여서인지, 세상에 Quelque chose 같은 딱 떨어지지 않는 관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워서인지, 다시 만난 이 작품을 일 년 동안 몇 차례 반복해 읽으면서, 작품이 사랑받고 수많은 청춘들을 위로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점차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세계에 살고 있는 불완전한 인간들이고, 저마다 정도와 모양은 다르지만 내면의 뒤틀림을 겪고 있다. 그렇기에 상처를 바라보는 관점과 치유의 방법도 다르고, 방법에 따라 치유되는 수준도 제각각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마땅하다는 듯이 사라져 버리고, 멀어져 버리는 것들에 대한 상실감과 마땅히 겪어야 하는 것들을 겪으면서 져야 할 책임이 발생한다는 사실만은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청춘이 바쁘고 혼란스러운 것은 이 상실감과 책임감이 만드는 바이오리듬의 굴곡들이 상호 존중적 분위기에서 조정을 거쳐 정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때로 살아가면서 치러야 하는 대가 지불의 유예, 책임의 유보가 빚쟁이처럼 존재를 찾아와 독촉하기 때문에 청춘에는 늘 혼란이 가중된다. 하루키는 우리가 공허한 이유, 내재적인 외로움과 고독에 시달리는 이유를 제시하고,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상처를 다독인다. 이는 모두가 같은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에 너 또한 괜찮다는 천박한 위로가 아니라, 아픈 것은 당연한 것이니까 받아들이라는 무식한 치유의 시도가 아니라, 결코 상처가 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상처를 바라보고 붕대를 감아야 사태를 수습할 수 있다는 차갑지만 다정한 조언이다. 하루키 작품 답지 않게 와타나베, 나오코, 미도리, 레이코, 나가사와, 하쓰미, 특공대 등 여러 인물들의 생활을 꽤 비중 있게 담아내서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고, 같은 상실도 없으며, 상실의 직/간접 경험의 축적도 다음 상실이 덜 아프도록 막아주진 못한다는 사실을 건조하게 지적하고, 각자가 치유되는 과정과 저마다의 삶을 살아내는 모습을 애정 있게 담아낸다. 그러니까 너도 할 수 있어! 가 아니라 그랬다. 그리고 너는. 하고 담담하게 묻는다. 그리고 마침내 와타나베의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하는 질문으로 이어져,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나는 누구인지에 대하여 생각하고, 그로써 스스로의 상처를 바라보고 치유로 나아갈 수 있도록 조용히 팔을 잡아 이끈다.



<노르웨이의 숲>은 아마도 하루키 월드를 이루는 작품들에게 내내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쿨하고 터프한 와타나베는 <해변의 카프카>의 카프카를 닮았다. 요양 목적의 비영리 단체이자 코뮌 재질의 공동체인 요양소, 밤과 꿈, 그리고 달빛을 등 삼아 나타나는 비현실적인 모습의 나체를 한 소녀는 모두 <1Q84>의 설정을 연상케 한다. 기차와 기차역에 대한 관념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도쿄에 대한 단상은 <언더그라운드>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떠오르게 한다. 이외에도 누군가에게는 성행위 자체가 치유가 될 수 있다는 설정이나, 성행위에서 물리적 행위의 의미는 지우고 이를 깊은 정신적 교감에 비유하기도 하는 것, 나오코의 처녀성, 치유의 유예, 죽었기에 그 나이에 멈춰 자라지 못하는 영혼들, 비틀즈, 영혼의 고독,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와 같은 단상들이 장편뿐만 아니라 다른 중, 단편들에서도 자주 드러난다. 우리는 매일 이별하고 잃어버리고 있다. 서른이었던 나와, 서른하나였던 그와, 서른둘이었던 그녀와. 오늘보다 더 소년이었던 어제의 나와. 어제, 살아남기 위해 대가를 치르거나, 대가를 치르지 않고 슬쩍 빚을 지거나, 무언가를 잃거나, 잃지 않기 위해 슬쩍 주머니에 그것을 숨겨버린 우리 모두는, 오늘, 어제와는 어딘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제보다 오늘 더 어른이 된 하루키가 영원히 소년일 수 있는 이유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영원히 자라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계속 비슷한 이야기를 하며, 끊임없이 위로를 건네고 있는 것이다.



작품은 하루키의 여느 작품들처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것,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 Quelque chose로 가득하긴 하지만, 그의 다른 작품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애매모호하고 직접적이다. 미도리의 말처럼 인생은 비스킷 깡통이다. 원하던 맛의 비스킷이 나오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큰 조각이 나오기도 하고, 부스러기에 가까운 조그만 조각이 나오기도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묵묵히 깡통을 비우며 일희일비하기도 하고, 상실에 맘 아프기도 하지만, 계속 깡통을 비우며, 삶을 살아내는 것뿐이다. 레이카의 말처럼  행복을 계산하고 불행을 재단해서 인생을 완전한 것으로 설계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상실을 겪은 후 온몸에 생채기가 가득해도 푹 쉬고 다시 일어나 더 많이 많이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행복해질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를 잡고 놓치지 않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내 시선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해 걷는 것이다. 서로 다른, 불완전한 우리가 서로에게 어깨를 빌려주며, 백사장의 밤을 보내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거대한 메타포 속 어디쯤에 닿았든. 어떤 의미이든. 행복해지자. 살자, 오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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