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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녘 연필소리 Feb 05. 2024

<헛간을 태우다(반딧불이)>, 1983

우물 안의 시간들

[헛간을 태우다(반딧불이)-무라카미 하루키] 우물 안의 시간들


 어떤 대상이 실제로 존재함(實存)을 확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물질적으로 현실에 머물러 있다고 하여 본질적 의미를 인지하지 못하는 존재가 실존한다고 말할 수 없고, 존재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 판단이 늘 절대적으로 맞는 것은 아니다. 실존은 이룩하기 꽤 까다로운 목표다.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으면서, 그러나 절대로 서로 닿지는 않으면서, 매주 토요일 말없이 걷던 두 친구가. 일 년 후에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더 시간이 지나 밤하늘 아래 체온을 나누는 사이가 되어도. 서로의 곁에 누워 있어도. 창 밖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두 눈이 공허하게 텅 비어 있는 이상 상대방의 존재를 믿는 다른 한쪽은 결국 고독 속에 혼자 남고 만다. 의미 없는 말들로 허공을 채워 다가오는 결말을 외면해 보려는 노력은, 많은 말들을 주워 삼겨 서로가 서로에게 갖는 의미를 설명해 보려는 노력은, 끝끝내 무색해지고 만다.


나는 우물 아래에 쪼그려 앉아 동그랗고 조그맣게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가 그 끝에 보이는 얼굴을 사랑했다가, 두레박이 내려오지 않는 시간을 견디다가, 사라진다. 우물 끝을 다시 들여다보러 그가 돌아왔을 때 우물 바닥은 텅 비어있다. 원래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는 많은 것들은 어떤 무게였을까. 어떤 의미였을까. 반딧불이가 빛을 내며 어둠을 가르고 떠난다. 혼자 남은 이들은 속이 텅 비워내진 헛간을 태운다. 누군가가 헛간이 정말 타버렸는지 확인하려고 먼 길을 달려온다. 헛간은 그 자리에 있다. 헛간이 타올라서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잊으면 헛간은 그곳에 있다. 그러나 헛간이 타올라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 또한 사라지지 않고 그곳에 남아있다. 혹은 헛간은 그 자리에 없다. 헛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헛간은 그곳에 없었던 것이 된다. 그러나 헛간이 타올라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 또한 사라지지 않고 그곳에 남아있다. 헛간은 존재했었나. 헛간을 태운다. 활활 타오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관에 따르면 '우주의 만물은 메타포'다. 하루키의 장편 작품을 이 세계관을 기준으로 읽으면, 은유를 발견하고 그 깨달음에서 오는 환희를 먹고사는 독자라면 누구나가, 반드시 그 풍족함과 촘촘하게 깔려 있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성취감에 행복해질 수밖에 없다. 반면 하루키의 단편 작품은 읽는 사람에 따라 은유가 달리 읽힌다. 모든 인간의 창작물은 창작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나나, 하루키의 단편 특유의 엉뚱한 상상력, 기묘하고 섬뜩한 설정 때문에 유독 평범한 단어도 다른 무게와 느낌을 갖는다. 즉,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혹은 어떤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쓰지도 않았으나 그러했던 것처럼 작품 자체가 독자에게 저마다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독.


이창동 감독이 영화화하여 화제가 되었고, 월요일 빠셍과 감명 깊게 보았던 <버닝>의 원작이 바로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고 원작을 찾아 읽었을 때 이 작품 역시 하루키의 다른 단편들이 그러하듯 여러 사람에게 다르게 가 닿았음을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이창동의 <버닝>과 원형의 유사성은 이야기에 씨앗 정도에 머문다. 오히려 원작보다도 더 와닿는 부분이 많았는데 <버닝>은 박수받아야 할 성공적인 영화화 작업이지만 이 부분에서 더욱 그러하다. 지극히 문학적인 이야기에 비극적인 시대상을 유려하게 반영해 내는 방식이 특히 탁월했다. 업체 행사에서 텅 빈 춤을 추는 해미, 노을이 저물어가는 마당에서 의미 없는 춤을 추는 해미, 부유한 남자친구와 그의 친구들 앞에서 의미에 굶주린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흉내 내는 해미, 남산타워에 반사된 햇빛이 드리우는 창가 옆 침대에서 표정 없는 얼굴로 옷을 벗는 해미, 그 비어버린 몸짓에서 우리는 그녀의 공허한 눈빛과 마음을, 그리고 그 이유를,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헛간을 태우다> 역시 탁월하다. 하루키가 이 작품을 쓴 시기가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발표 전 3년간의 공백기라는 점에 포커스를 두고 접근하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고, 모두에게 실질적으로 '작용하는' 수많은 사유들, 의식과 무의식이 내린 선택들, 시시각각 다가오는 선택의 시간과 선택의 뒤를 따라 조여 오는 숙명의 무게를 발견할 수 있다. 15페이지 남짓 되는 짧은 이 작품으로 여러 형태로 변주될만한 이야기를 해내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이 노작가의 팬이라는 사실이 스스로 자랑스러워진다.


이야기는 우주와 같고, 메타포로 이루어진 하루키의 우주는 늘 웅숭깊지만, 특히 기억나는 한 이야기만 꼽자면, 우물 안에서 우물의 벽이 허락하는 정도의 하늘만 올려다보고, 동그랗게 오려진 하늘 정도의 세상만을 허락받은 ‘나’의 시간들이 기억에 남는다. 해미 또한 그런 우물 안의 시간 속을 살았을 것이다. 종수가 그녀가 실존한다고 이야기했던 우물을 찾지 못했고, 그녀 주변의 누구도 물성을 가진 존재로 우물을 관찰한 바 없다는 이유로, 우물의 존재는 거짓말로 치부된다. 그러나 인간이 명백한 존재적 한계를 지닌 존재고 어떤 인간도 물리적으로 허락된 범위 이상의 세계를 살아낼 수 없다는 측면에서, 우물은 실제로 존재한다. 우물의 지름 정도로 허락된 우주 안에서 누군가는 자신 안의 우주를 들여다보고 자신의 의미를 찾아 유영하며 더 깊은 우주로 향한다. 누군가는 자신의 내핵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본질적 자아, 자신의 의미에게 우물의 벽이, 그래서 좁다란 모양으로 허락된 하늘이, 그래서 좁고 작은 우주가 되기를 자처한다. 그의 짧고도 깊은 편지가. 편지로 쓰여진 긴 메타포가. 메타포로 쓰여진 우주가.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독자에게 묻는다. 우물 속의 시간들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우물 속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


2021. 1. 쓰고, 2024. 2. 조금 고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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