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한 어린이집 선생님을 붙잡고 펑펑 운 날, 찐따맘 인증하다
우리 아기 열도 내리고 좋아졌는데도 아침부터 내내 보채는게 어린이집을 보내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날- 이 불길한 예감 때문에 나도 기분이 영 좋지않았다. 벌써 며칠째 너랑 나랑 타요버스랑 시간을 보내고 있는거니?
세수만 하고 입은 잠옷 그대로 아기를 챙기다보면 뼈를 갈아 준다는 표현이 맞는 그런 오전이 지난다. 지난다는 표현이 야속할 만큼 그 시간은 느리게 간다. 아기가 자는 틈을 타 늦은 아침으로 육개장을 하나 말아 놓았다. 그마저도 우는 아기를 달래 다 불어터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작은 희망으로 자문한다.
'오늘은 어린이집 보낼 수 있을까?'
영 미련이 남아서 아기의 상태를 매분 체크한다.
오늘 애미의 우울은 인스타그램에 기인했다. 종종 유별난 좌절을 선물하는, 그래도 당최 끊을 수 없는 묘한 매력이 있는 녀석이다. 오늘은 인스타 피드로 저마다 나와 같은 애기엄마지만 일도 하고 활동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한숨이 나왔다. 저들은 과연 어떻게 시간을 내서 저 높은 산을 오르나? 저 초딩의 부모는 어떻게 이 마의 영유아기를 버티고 저 고지를 올랐는가? 이제는 자녀의 교육을 고민하는 모습이 마치 가장 힘든 구간을 지난 마라토너의 여유처럼 보인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어깨 빠질 노동은 없어 보이니 말이다. 경험해 보지 않아 쉽게 나오는 말일게다.
오후가 되자 아기의 컨디션이 제법 좋아졌다. 몸으로 놀아달라고 보채는 아기를 보자마자 어린이집 등원이 오후 1시에도 가능하다는 것이 생각났다. 오전 일찍 키즈노트를 통해 담임 선생님도 아기를 기다린다는 설레는 제스처를 보내주셨기에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하루 중 가장 신나는 표정으로 바지런히 물건을 챙긴다. 아기 가잿손수건, 손닦이 수건, 칫솔, 밥... 힙시트를 매니 '어야 간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아기도 신나한다. 그래 아기야 너랑 나랑 다 신나는 일이니 이 얼마나 좋니?
앞 동에 위치한 아기의 어린이집으로 가는 길 콧노래가 나왔다. 그리고 도착한 어린이집 선생님, 담임 선생님이 아니었다. 아기들이 모두 자고 있어서 어려운 시간에 왔다는 그 선생님의 말씀, 이해는 했지만 속이 상했다. 아니요 우리 담임 선생님은 분명히 우리 아기를 기다리신다 했는데... 아기의 컨디션을 여쭤봐주시고 궁금해 하신 담임 샘의 환영까지는 아니라도 밝은 인사를 기대했던 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순간. 육아전쟁터의 몇 안되는 아니 유일한 비빌언덕에 배신 당한 기분이 들어 아기를 도로 데리고 돌아오면서 눈물이 났다. 별거 아닌게 참 별스러운 육아 맘의 멘탈은 이렇게 또 유리가 된다.
이내 담임샘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기를 그냥 데리고 간 게 마음에 걸리셨었나보다. 고맙고 죄송한 마음에 눈물을 왈칵 쏟았다. 기관 선생님들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괜한 몽니를 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도 낳은 다 큰 여자가 왜 그렇게 옹졸하게 굴었는지 나도 내가 미웠다. 지난 두달간 아기가 아프고 낫고를 반복하며 잃어버린 일상속에서 그냥 아이처럼 억울하고 슬픈 감정이 북받쳐올랐다. 누구 하나 잡고 울 사람도 없었다. 누구를 탓할 일도 없다. 그저 수화기 너머의 어린이집 선생님이 나에게 어깨를 빌려주셨다. 선생님이 무슨 죄라고... (죄송합니다)
성인이 되어 아기를 낳아 키우는 사람은 다 어른인 줄 알았다. 마치 출산 후에는 자동으로 모두가 육아라는 모진 고난을 다 이겨낼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우리 아기처럼 미성숙하고 화가 나고 눈물이 나고 억울한 큰 어른이일 뿐이다. 이렇게 힘든 게 육아 인줄 알고 아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누굴 원망하겠노.
아기야, 엄마도 정말 이렇게 힘든지 몰랐단다. 나도 너처럼 그냥 우리 엄마 품에 안겨 그저 울고싶단다.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엄마 곁에서 자고 일어나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싶다. 엄마가 타주는 미숫가루 한잔 하면서 빨래 개는 우리 엄마 옆에서 테레비 보고 싶다. 오늘은 그런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