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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nda 린다 Jul 20. 2020

어머님댁에 맘까페 놔드려야겠어요

육아라는 폭풍 속에 남편 손 말고 잡아야 할 것이 있다면...


어머님이 되었다.


출산후 1년이 지난 지금은 조금 익숙해진 그 호칭, 넉달 전 처음 어린이집 상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웃음이 피식 나왔다. 내가 어머님이라고? 어린이집 선생님 매 마디마다 꼬박 어머님의 호칭이 들어가는 대화 안에서 새삼 내가 바로 그 '어머님'이 되었구나 깨달았다.


아이의 엄마가 되고나서 어머님으로 존대와 이해를 받는 많은 일들이 생겼지만 사실 그보다 더 조심스럽고 힘든 상황이 많았다. 타인의 비위를 상하지 않게 차안에서 기저귀를 가는 일, 아기 이유식을 데워달라고 식당에 조심스레 부탁하는 일.. 잠깐의 외출에도 아기를 연명하기위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때로는 엄마를 욕받이로 만들었던 에피소드기에 더 조심스러웠다. 질책일지 모를 무언의 눈빛을 피해 겨우 아기와 나의 안전한 현관 문 안에 들어선 후에야 마음이 놓이는 일상 그게 엄마의 일과였다.


육아맘을 향한 한없이 가벼운 시선은 나에게도 꽤 서러운 무엇이었다. 갈수록 팍팍해지는 살림 살이에 혐오가 싹튼다지만, 엄마를 향한 혐오 일명 맘충에이라는 박한 호칭으로 폄하하는 아무개들의 글들을 읽을때면 밥맛이 뚝 끊겼다. 혐오를 뱉는 그들 역시 세상 힘들거나 놀라 자빠질때마다 찾는 게 바로 엄마 일텐데 말이다. 매일의 과업과 육체적 노동에 노출된 우리 엄마들을 향한 이해 없는 질책의 눈빛이 얼마나 비인간적인가?  


엄마가 되고 나서 한동안 나는 마치 원시우림의 태초의 인류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사회적인 체면 따위의 욕구 충족은 매순간 아기의 생리적 욕구를 채워주느라 저 멀리 안드로메다에 보내고 그저 생존이 목표인 사람처럼 우왕좌왕. 이런 힘든 시기에 초보 엄마인 나의 사정을 최대한의 이해와 존중으로 감싸안아준 이가 있었다. 회원수 9천명 남짓한 우리 동네 맘까페 였다.


맘까페는 우리 사회에서 한동안 여론에 영 좋지 않은 인상을 풍겼었다. 맘까페에서 알게된 정보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꼬인듯한 리액션을 듣곤했다. 맘까페의 정보는 누군가의 뇌피셜 일 뿐이고 그들은 갑질을 서슴치않는 안하무인의 아줌마 부대로 여겨지는 폭력적인 편견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오늘 불현듯 누군가 뱉어놓은 맘까페에 대한 욕들을 지나치지 못하고 욱하는 마음에 지난 일년간 맘까페를 사용한 소회를 끄적여보려고한다. 맘까페는 그런 취급을 받을 클래스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싶어서다. 맘까페만큼 지친 육아맘에게 온기를 줄 수 있는 게 몇이나 된다고? 엄마들이 정신줄을 놓고 SOS를 칠 때, 밤낮없이 그 곁에 있어주는 건 남편이 아니었다. 맘까페, 그것은 육아라는 한겨울 혹독기에 아버님댁에 놔드린다던 전기보일러 만큼이나 훈훈한 것이었다.


아버님댁엔 보일러가, 어머님(육아맘)에겐 맘까페를 놔드리고싶을 정도다. (출처: 유투브)




두해 전쯤 해외에서 석사학위를 밟고 있던 둘째 언니는 벌컥 들어선 첫 애 때문에 관련된 정보를 한국의 맘까페로 귀동냥 중이었다. 출장 차 들렀던 언니네 집에서 형부와 식사를 하는데 언니의 이런 정보수집 행태를 은근히 무시하는 형부의 뉘앙스에 무척 성이 났었다. 형부는 이성적 논리로 무장해야할 논문 작성 중인 사람이 어디서 출처 불명의 아줌마들의 썰들을 논하냐며 한참 훈수를 두었다. 맘까페가 무엇이었던간에 내 언니를 타박하는 형부가 미워서 공항으로 가는 차안에서 눈물을 훔쳤던 기억이다.  


맘까페는 보통 포털사이트의 까페라는 플랫폼에 근거한 온라인 커뮤니티를 일컫는다. 취미나 지역 등 다양한 주제를 기반으로 모인 수많은 까페 중에 '맘까페' 라는 통칭으로 분류되는 이것은 지역마다 적게는 수천의, 많게는 십만명 이상의 사용자를 갖고 있다. 맘까페는 어린시절 동네 마을의 부녀회 혹은 마을회관 옆에 큰 정자마루의 역할을 온라인화 한 것이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백일의 기적이 오기 전 나는 새벽마다 맘까페에 드나들었다. 새벽수유를 막 마친 적막이 도는 시간에도 저마다의 고민과 이야기로 북적이던 맘까페에 입장할 때면 마치 딴세상이 열린듯 했다. 클릭 한번에 도착한 시끌벅적한 라운지에서 이 지랄맞은 육아의 등쌀이 비단 나만의 것임이 아님을 알려준다. 그곳은 정보의 교환처가 아니라, 당신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상담소 같은 곳이었다.


맘까페가 얼마나 유용한지 일단 써보면 안다. 망망대해 같은 포털 검색결과 보다 같은 키워드라도 내가 필요로하는 내용을 찰떡같이 알아듣는 검색결과가 무궁무진 하다. 임신 출산 육아라는 인생의 다이내믹하고 긴, 게다가 무척 외로운 이 과정을 겪는 20-40대 여성에게는 같은 관심사의 친구 같은 존재가 바로 맘까페였다. 육아를 하다보면 으레 한 몸 같던 남편도, 뭐든 들어줄 것 같았던 베프, 식구들과도 적지않은 정서적 육체적 괴리를 느끼게 된다. 이 몸과 마음이 시달리는 육아라는 게임에서, 맘까페에서 공급되는 시의 적절한 정보는고단함을 줄여주는 만능 치트키라는 것은 게임의 단수가 높아질수록 알게 된다.


더 말하면 입이 아픈 맘까페의 유용성을 떠나 더 중요한 맘까페의 기능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 그 온기에 있다. 육아라는 긴 여정에 아는 사람만이 알아주는 수고스러움과 외로움은 육퇴 후 혼술하다 끄적거리는 수많은 맘까페의 글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동지 엄마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생각이 들면, 처음 앓아본 아기의 열감기에도, 육아로 다툰 남편과의 부부싸움에도 다시금 위로와 힘을 받기 때문이다.


맘까페, 이 안의 수많은 이야기가 있고, 그 안에는 저마다 육아와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고군분투하는 엄마들이 있다. 그곳의 일부 왜곡된 장면이 전체라 생각치 말자. 모든 맘까페는 저마다 다른 캐릭터와 분위기가 있는데, 그런 색을 잃지않는 자유로움과 통제 역시 공존하는 곳이다. 커뮤니티가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상당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쉬지 않고 흘러 충분한 자정능력을 가진 내천, 작은 강줄기와 같은 곳이다.


믿고 거르는 맘까페- 이런 말은 더이상 통용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어든 공공의 적으로 모는 행위는 무지에서오는 경우가 많다. 이 역시 같은 이유일게다. 맘충으로 혐오를 하든, 맘까페라 비웃음을 치든 그들 모두가 수많은 애미가 품어 나온 생명이다. 그 애미들이 마른 목을 축이는 작은 샘물에 본인의 미충족된 욕구를 배설하지 말자. 혐오는 과감하게 쓰레기통에 버리는 걸로...


(출처 : 트위터) 이 글을 보면 맘까페 사용자들의 서로를 향한 깊은 이해와 배려가 느껴진다. 엄마들은 육아라는 전쟁의 외로운 병사다. 남편에서 못찾은 전투애는 맘까페에 있단다.


+ 어떤 형식의 그룹이던 명암은 존재하고, 그것을 정화할 스스로의 능력을 취한 곳인지 아닌지만 판단한다면, 맘까페는 아주 건강한 곳임을 알리고 싶어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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