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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nda 린다 Sep 18. 2020

나의 장래희망 변천사

나는 무엇이 되고 싶었나?

어린시절, 으레 형식적인 조사지만 매년 장래희망을 적어냈다. 시골 자락, 자유로이 딸 셋을 방목해 키우신 부모님 덕에 나는 일말의 상의 없이 내가 원하는 바를 적어 넣었다. 내가 작성한 칸 옆에는 부모님이 희망하는 칸도 있었다. 물어보나마나 부모님 칸은 그저 내가 쓴 단어를 한번 더 적어내는 일이었다.

그냥 딸 되고 싶은 거 써~


내가 자라온 긴 시간 이런저런 상황에도 부모님은 자녀의 미래만큼은 단 한번 불안해하거나 조급한 기색이 없으셨다. 부모가 되고 보니 그 모든 게 부모님의 노력이었음을 느낀다. 그런 현명한 부모가 되는 일은 쉽지 않다는 걸 알아가고 있기도 하고-


어쨌든 덕분에 나는 오롯이 '내가 바라는' 나의 장래를 생각할 수 있었다. 크게는 내가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 그중에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꽤 괜찮아 보이는 것, 그리고 엄청 돈이 많이 든다던지 난코스가 예상되지 않는 것들을 적었다. 어린 나이에도 가정형편을 알았기에 미술이나 운동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철없는 아이로 자라기엔 녹록지 않은 시절이었다.


나의 장래희망은 좁은 범위에서 왔다 갔다 했는데, 돌이켜볼 때 까마득하게 어린 나이부터 우리는 꽤 뚜렷한 자아를 그리기 시작하는 것 같다. 초딩 조카 지용이나 동네 아이들을 보면 왜 저렇게 애늙은이 같지 놀랄 때가 많은데, 놀랄 일은 아닌게다. 생각보다 그들의 자아는 성인이 된 후와 큰 변화를 있지않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나 역시 그러했고.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 초등학교 4학년쯤 적어냈던 장래희망은 기자 였다. 하교마다 귀찮아하는 엄마를 붙잡고 이야기보따리를 풀던 소녀는 원래 소설을 쓰고 싶었다. 다만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스토리텔링이 약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린 마음에 사건사고 같은 사실에 근거해 풀어내는 일이라면 승산이 있겠다 싶었다. 지금에야 기레기라는 폄하가 일상이지만 그때만 해도 기자는 법을 제외한 문과계 지성의 최고봉이었다. 나의 장래희망은 내가 타협할만큼 원하는 것들 사이에 존재했다.


중학생 때에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그때 곧잘 어울리던 친구는 글재주가 기가 막혔는데 특히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글감, 그러니까 말의 밥- 말밥을 찾는 게 특기였다. 뜬금없는 장면과 소재에도 찰떡같이 빚어내는 비유가 탁월했다. 그녀가 쓴 글귀마다 읽고싶은, 아니 먹고싶은 밥 냄새가 진동했다. 그 친구가 부러웠다. 소설가든 시인이든 글쟁이가 될 거라 확신했던 그 친구는 지금 맥주회사에서 사무직을 한다. 그때 나의 장래희망은 남에게서 부러운 것들 그 중간쯤 있었나보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슬슬 나의 위치를 객관화하고 그에 맞는 미래를 꿈꾸긴 개뿔, 공부하기 바빴다. 수험생들에게 미래를 상상하는 건 사치일 뿐, 그 시간에 단어 한자 외워야 된... 그래도 채워 넣을 장래희망은 매해 돌아왔다. 내가 작성한 마지막 장래희망은 대기업 회사원이었다. 테레비 드라마마다 명찰을 차고 바쁘게 서류를 작업하는 장면이 가득했다. IMF로 부모님의 실직을 경험했던 우리였다. 반 친구들 반이상이 대기업 회사원을 적어 넣던 시절, 내가 자란 곳이 농촌이라 남의 녹 받는 사무직만큼 그럴싸해 보이는 게 없었나보다. 회사원으로 10년을 일하고 돌이켜 볼 때, 실소를 금치 못하겠다. 그때만큼은 진지했다. 뭐 기왕 남의 집 종노릇을 하려면 부잣집 종이 되라는데, 대기업 회사원! 그래도 일말의 선견지명은 있었으리라. 그렇게 꿈꾸던 소녀는 졸업 후 대기업은 아니지만 중소기업 사무직으로 일을 시작했다. 마지막 장래희망은 결국 모두의 장래희망, 대세의 중간 어딘가에 있었다.




서른 중반을 넘어, 새로운 창직에 도전하는 지금 나는 나의 장래희망을 다시 적어가고 있다. 어린 시절 나의 한계와 타인의 생각에 집중했던 장래희망들을 복기하며, 지금 나는 무엇을 우선순위로 두는가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기쁨이다. 일의 기쁨- 나는 어떤 일에서 더 큰 기쁨을 만들 것인가? 회사에서 하던 선택지의 최적화, 이제는 판매품목 SKU나 유통채널이 아니라 나 자신이 그 주제이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종종 헷갈렸던 게 있다. 내가 느꼈던 보람과 기쁨의 출처였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보람과 기쁨은 있었다. 발표자료를 만들다 완성된 슬라이드에 짜릿한 느낌, 보스 지시를 수행해서 그의 만족한 표정을 보는 것 이런 내 모습에 내가 내 일에서 기쁨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정서의 출처가 일 자체였는지 아니면 타인을 통해 채워지는 인정 욕구 해소에 따른 것인지 영 헷갈릴 일이 많았달까. 십 년의 시간 동안 늘 궁금했지만 아리송한 질문지 였다.


최근 들어  답을 찾았다. 출산을 계기로 본업에 손을 떼면서다. 이렇게 브런치에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고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고 내가 구상하는 기획 일을 시작하면서다. 오롯이 나의 일을 하면서 '나를 드러내고 나의 것을 창조해내는 '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매달 25 적지않은 금액이 따박따박 찍히는 것을 뛰어넘는 -  자신을 키우는 일은  이상 '' 아니라 '기쁨' 된다.


그래서 '일의 ' 아니라,
'일이 기쁨' 되는 과정을 겪는 .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어린시절 장래희망 칸을 채우기 급급했던 어린 나에게 직업의 장래성이나 가능성 대신 순수한 기쁨의 출처들을 관찰할 여유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내 안에 이렇게 창작의 희열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그림이나 글 쓰는 재주가 부족하다거나 모자란 모의고사 점수를 이유로 성급히 욱여넣은 답을 정해놓고 살지 않았을 것 같다. 지금 작성 중인 나의 새로운 장래희망은 칸 하나로 부족하다. '나'라는 엄마, 기획자, 예술가, 디자이너, 작가, 또 무언가 꿈꾸고 시도하는 사람-


다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다. 모든 경험이 켜켜이 쌓여 또 다른 나를, 발견을 만들겠지- 요즘 일하면서 행복한 나를 지켜보면 무척 새롭다. 연말에 받을 고과점수나 내년 승진을 상기시키는 보스의 아리송한 칭찬 뭐 그런 것 없이도 잘 돌아간다. 이런 내가 생경하다. '장래희망'은 그런 생각에서 떠오른 글감이었다. 물론 아직도 경단녀, 직장, 월급, 남들은? 이라는 안개가 종종 출몰하지만 적어도 이정표 보는데 문제 가 있을 정도는 아니다. 일찍이 나보다 이런 창직의 삶을 살아온, 그래서 그 험난함과 희열을 아는 남편이 종종 하던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아, 내년이 기대된다.
내가 얼마나 성장했을지-
또 얼마나 행복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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