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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nda 린다 Oct 21. 2020

가을이 우울하지 않은 이유

가을이 끝나간다. 계절의 끝에 고개드는 우울감에는 산책 만한게 없다. 열심히 걷다보면 이맘때쯤 코끝을 맴도는 가을향기를 발견한다.


자랄대로 자라 푹 숙인 풀들과 치렁치렁한 나무들의 월동준비가 느껴지는 향기다. 골목마다 풍겨대는 눅진하고 진한 풀냄새 뒤로 과한 시원함과 쌀쌀함이 뒤섞인 냄새를 맡는다. 가을이 가고 있다는 신호다.생각해보니 매년 이 향기는 묘한 설레임을 주는 무엇이었다. 산책 중에 밟힌 가을냄새에 괜시레 밝아진 마음 한켠을 발견하고 곰곰히 생각해봤다. 이유는 크게 두가지 였다.


이 맘때 오고있는 겨울은 내게 크리스마스다. 겨울이 온다는 건 크리스마스에 더 다가간다는 것. 남들과 다를바 없는 연례행사에 가족들과 거창하지 않은 선물을 주고받는 소소한 날이지만 크리스마스가 주는 특별함은 늘 절대값으로 인식된다. 남들과 비교하며 일시적인 자괴감이나 만족감을 빠지는 일상과는 영 다르다. 비교대상이 없어도 내 달력안의 붉은 25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마음, 연애때 지금의 남편인 남자친구와의 만남 같았다. 딱히 신나는 계획없이도 생기가 돌고 눈동자가 번뜩이던 마법! 이 효과좋은 보약을 연말에 되서야 즐긴다는 건 아깝다못해 사치다. 찬바람 들기 시작하는 이 맘때부터 크리스마스 이브 느낌을 잔뜩 느껴보리라. 우리에겐 크리스마스가 오고 있다!


다른 한가지는 학창시절의 기억 때문이다. 학창시절 이 맘때 내가 제일 사모했던 고등학교 선배언니 또는 제일 의지했던 동년배 친구와 거닐던 가을 풍경이 떠오른다. 추수를 막 마친 강원도 시골, 그 풍경에는 애정하는 누군가와 따뜻한 연결 속에 있다는 안도감, 고민을 털어놓고 맞장구를 치는 것 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순수하고 어린 내가 있다.


집 근처 제일 큰 7층짜리 사우나 건물 위에 내가 다니던 독서실이 있었다. 독서실은 넉넉치 않았던 우리 집 형편에 유일하게 나에게 허락된 사교육? 이었다. 친구들처럼 학원을 다니지 않으니 선후배나 친구들을 만나는 학교 외적인 공간이 독서실 뿐이었다. 그곳 휴게실에서 먹던 읍내 불티나 분식의 찐만두와 김밥이 더 맛있었던 계절 역시 이맘때의 가을이었다. 가끔 운이 좋으면 주말 오전 혼자 나와 공부를 하고 있다고 선배에게 롯데리아 새우버거나 감자탕을 얻어먹기도 했다. 그래서 늘 이 가을 공기에 서려있는 행복한 감정을 발견한다.


어제 오늘은 아픈 아기를 돌보느라 혼자 쩔쩔매며 힘에 부친 날이었다. (열이 제일 밉다) 오전 일찍 아기 진찰차 갔던 이비인후과 의사가 엄마 목이 더 심하게 부었다며 약을 지어주었다. 그저께는 나에게 도통 떠오르지 않는 미래와 진로에 대한 고민과 번뇌로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떠난 직장의 동료에게서 전화가 와서 일에 대해 얼버무렸다. 할게 많아 걱정이라는 되도 안되는 허세를 부리고 자리에 누었다. 그림도, 글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 위를 뒹굴다 쪼그라진 나를 발견했다. 그러던 오늘 가을 냄새를 맡고 다시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책로 앞에서 작은 결심도 했다. 나에게 남은 카드가 뭐든 일단 나는 낙천적인 나로 살겠다는 다짐이다. 이번 생은 그렇게 사는 걸로... 가을 냄새가 참 좋다. 나도 다시 내가 되어 살아가야지-

숲이랑 얼집 가면서 산책, 녀석얼굴에서 이제 어린이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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