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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나 Oct 11. 2024

스트리트 아가리 파이터

2024 늦가을, 갑자기 겨울이 됨


나는 뒤늦게 화가 나는 스타일이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면서 화 타이밍이 늦는 것만큼 화나는 일은 없다. 나의 화 타이밍은 보통 하루를 마무리하고 설거지를 할 때 끓어오른다. 그릇의 뽀독뽀독 소리를 배경 삼아 속으로 ‘아니 근데 잠깐 나한테 아까 한 말은 무슨 뜻이었지?’를 곱씹는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되지 않기로 다짐했고 긴급 시비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싸움 시뮬레이션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직장 생활을 하며 많은 재앙의 주둥아리들을 만나본 결과 나는 그들을 말로 이길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재앙의 주둥아리(이른바 ‘재주’)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내뱉는 경우가 많다. 가끔 재앙의 주둥아리들이 요즘은 T라는 이름하에 포장되는 경우를 보며 나는 답답함에 가슴을 벅벅 친다. 보통 남다른 입을 가진 사람들은 일단 말하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테면 이런 말들이다.


“오늘 추석이라고 구내식당 도시락에 갈비도 나오고 떡도 나왔네요.”
“어머, 이거 네 앞에 놓으니까 제사상 같다.”


그들은 나처럼 말싸움에 취약한 인간을 골라내는 레이더 같은 게 있어서 콕 집어 나에게만 이런 말을 건넨다. 상상 속의 아가리 파이팅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나는 ‘오늘 제사상 받고 싶지 않으시면 닥치시죠’라고 눈을 부라리고 말했어야 했다. 현실 속에서 나는 ‘아가리 파이팅’을 ‘내가 한 마디 했어야 했다’고 아가리로만 하는 인간이기에 집에 가서 뜨거운 물로 설거지며 곱씹는 수밖에 없다. 



대게 이런 말들은 설거지를 백 번 해도 잊히지 않으며 나는 일기장 맨 뒤편에 개미만 하게 적어놓은 데스노트에 이름하나를 추가하는 수밖에 없다. 저런 사람들의 특징은 선택적 분노조절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보통 자기 윗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 분노가 없이 태어난 사람처럼 구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윗사람에게도 분노 조절을 못하는 사람이라면 비범한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슬픈 사실 하나는 미친놈 보존의 법칙은 과학이라는 점이고 어느 조직에 가나 이런 사람들을 꼭 마주치게 되어있다. 


작년 1월엔 인생에 할당된 또라이의 양이 너무 많아 참을 수 없었고 상상 속 시뮬레이션을 위한 뇌 용량이 모자라던 시점이었다. 그때 닥! 어? 내가 받아쳤어야 하는데. 왜 나는 말로 사람을 이길 수 없을까. (한숨) 심장에 가시를 콕콕 박아 넣고 싶었는데. (한숨.) 쩝. 이렇게 말한 사람은 줘 패도 합법이 아닌가. (한숨) 한숨으로 땅이 꺼져갈 무렵 동거인 H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무슨 일 있어?”


나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고, 나보다 사회생활을 더 많이 한 경력자로서 그녀는 나에게 몇 가지 기법을 전수해 주었다. 첫 번째 기법은 ‘빙그레 쌍년’ 기법으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 법’을 활용한 것이다. 거지 같은 말이라도 웃으며 해 뉴런 시스템을 교란하는 것이랄까. 이 기법을 아까 말한 대화에 응용하면 다음과 같다.


“오늘 추석이라고 구내식당 도시락에 갈비도 나오고 떡도 나왔네요.”
“어머, 이거 네 앞에 놓으니까 제사상 같다.”
“(웃으며)어머, 정말요! (다른 도시락을 건네며) 먼저 가는덴 순서 없으니까 먼저 드실래요? 제삿밥? 꺄르륵!”


나는 상상만으로 짜릿해졌다. 두 번째 전략은 안 웃기면 웃지 않기. 어색하면 웃고 화나도 웃는 습관성 웃음 병자인 나에게 이만큼 어려운 일이 있을까. 두 번째 전략에 함께 곁들이면 좋은 말은 바로 ‘이게 정말 웃기세요?’라고 진심으로 궁금한 듯 물어보는 것이라고 했다. 마음속 깊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아이의 표정을 하고선 물어보는 것이 바로 포인트. 동거인 H는 앞으로 사회생활을 하려면 이 정도 수련은 필수라고 했다. 도대체 그녀는 어떤 사회생활을 거쳤던 것일까. 그리고 그녀는 끝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그 사람들 생각을 안 하니까 그 사람들이 내 인생에서 사라져 있었어.”

이것이 그녀가 말한 세 번째 비법이었다. 남들이 하는 말을 그냥 잊어버리기. 그 사람들을 내 인생에 들여놓지 않기. 이 대화 이후로 설거지하며 한숨 쉬는 일이 줄어들었다. 물론 또라이 보존 법칙은 여전히 유효하고 스트리트 시뮬레이션을 가끔 돌릴 때도 있지만. 이제 나는 안다. 그들은 내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 곧 사라질 사람들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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