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의 어느 날, 갑자기 한파가 찾아옴
뚝섬에서 성수로 매일 걸어서 출근하는 나는 날씨에 변화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도보 출근의 장점이자 단점이랄까. 요즘따라 출퇴근길에 부쩍 쌀쌀함이 느껴지는 날이면 사고 싶은 게 있다. 그것은 어묵도 아니고 붕어빵도 아닌 다이어리. 캘린더가 12라는 숫자를 향해 달려갈수록 새로운 다이어리를 향한 열망도 커진다. 빳빳한 노트를 펼치면 마치 전에 없던 세상과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펼쳐질 것만 같은 이 (통장의) 환상통. 10월 달부터 새로운 다이어리를 장만하고 싶어 좀이 쑤시는 나는 해가 갈수록 다채로워지는 다이어리 라인업에 정말 환장할 지경이다. 쓰지도 않는 다이어리를 집 한편에 적재해 두던 나는 (사실 책 무덤 중 하나는 노트의 무덤이라는 사실) 스스로에게 철학적인 물음을 던졌다.
‘나는 다이어리를 왜 사는가?’
‘나는 왜 이렇게 계획하고(만) 싶어 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내가 처음으로 다이어리를 쓴 시점인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러간다. 알림장이나 귀여운 자물쇠가 달린 비밀 일기장이 아닌, 정말 미래에 대한 계획을 빼곡하게 적었던 나의 첫 번째 다이어리. 표지에는 스케치로 그린듯한 수사슴이 그려져 있었고 한 손에 들어오는 콤팩트한 크기였다. 그 당시 엄마는 매우 엄격한 교육 철학을 견지했는데 나의 벽면에는 엄마가 짜준 과목 별 스케줄이 촘촘하게 붙어있었다. 아무래도 그 당시에 내가 스스로 내 인생을 살고 있다는 기분을 느낄 때는 다이어리를 쓸 때뿐이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 용돈을 모아 다이어리에 탕진하기 시작했는데, 이 사적인 악습을 지금까지 착실하게 행동에 옮기고 있다.
다이어리의 힘은 실로 신묘해서 ‘이번 달엔 돈 아끼기’라고 적기만 해도 내가 그 목표를 이룬 것 같은 효능감을 준다. 토모에리버처럼 좋은 종이와 가죽 표지와 같은 양질의 커버를 사용할수록 그 영험함은 배가 된다. 매년 1월이 되면 오타니 쇼헤이를 따라서 ‘만달아트’라는 것을 그린다. 사실 만다라트를 모두 채우는 것도 큰 일이어서 난 그 절반만 채우곤 한다. 절반만 채운 만다라트를 나는 ‘반달아트’라고 부르는데, 이런 반달아트에 꿈과 희망을 펼치는 게 하나의 의식이 되었다. 부와 명예 그리고 작가로서의 성공. 이루고자 하는 목표들을 모두 때려 넣고선 빙고 칸처럼 착착 지워내는 헛된 기대를 품으며.
친구들이 모두 송년회를 잡기 바쁠 때, 나는 내년을 위한 계획을 세우기 바쁘다. 누군가는 ‘좋은 계획의 적은 완벽한 계획이다.’라고 말하지만 나에게는 늘 이정표가 필요하다. 내년으로 달려갈 이정표를 찾기 위해 나는 다이어리에 적고 또 적는다. 나는 보통 여러 가지 다이어리를 사서 용도 별로 나눠 쓰는 편인데, 지금은 총 3권의 다이어리를 사용하고 있다. 첫 번째 다이어리는 ‘take a note’라는 브랜드로 작년 말 대만 여행에서 사 온 것이다. 대만은 문구 덕후의 천국으로 아시아의 3대 서점이라는 성품 서점이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나는 동거인 H와 함께 4박 5일의 대만 여행에서 드래곤 볼을 모으듯이 7개의 성품서점의 지점들을 순례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다이어리는 발바닥이 아프도록 뛰었던 결과물이다. 이 다이어리의 속지는 만년필에 적합한 토모에리버 종이가 사용되었다. 하루를 기록하는 칸도 큼지막해서 미니 일기를 쓰기도 좋다. 두 번째 다이어리는 소프트 커버 유선 몰스킨 노트로 업무 기획과 다양한 (소비) 버킷 리스트를 만드는 용도로 쓰고 있다. 소프트 커버 몰스킨 노트의 매력은 사용하는 만큼 커버가 내 손길에 길들여진다는 것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사용하는 다이어리는 미도리 트레블러스 노트다. 미도리 트레블러스 노트는 내가 취향의 커버를 선택하고 원하는 노트를 2-3권 조합해 나만의 다이어리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주로 나는 트레블러스 노트에 개인 일정이나 소비 기록을 적는다.
지독한 다이어리형 인간인 나는 애착 다이어리 3 자매가 항상 가방 안에 들어있어야 안도감을 느낀다. 왜 볼드모트가 자신의 호크룩스를 다이어리에 남겨 두었는지 알 것 같았다. 다이어리를 실수로 두고 온 날이면 마치 내 영혼을 다른 곳에 두고 온 것처럼 마음 한편이 쓸쓸하다. 사회생활에 낡고 지친 날에는 3가지 다이어리를 모두 쓰는 일이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스스로 스트레스를 만드는 체질’이라는 심리 상담 선생님의 말처럼 나는 또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에 울며 다이어리를 마저 쓴다.
나에겐 한 가지 로망이 있다. 바로 나만의 손때 묻은 다이어리를 갖는 것이다. 왜 이게 로망인가 싶겠지만, 다이어리에 손때가 묻으려면 최소 5년 동안 같은 다이어리를 써야 한다. 새것 좋아 인간인 나에겐 몇 개월의 고비를 넘기는 일이 참 어렵다. 매 년 새로운 커버들로 옷을 갈아입은 다이어리가 출시되어 나의 마음을 훔친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못다 쓴 다이어리를 채우며 다음 다이어리를 고른다.
오늘도 나는 속지와 커버가 고른 균형을 이룬 다이어리를 찾아 헤맨다. 어느 날 다이어리를 찾다가 논어 옹야편의 한 글귀를 마주했다. ‘바탕이 외관보다 나으면 거칠고, 외관이 바탕보다 나으면 호화스럽다. 외관과 바탕이 어울린 뒤에라야 군자답다.’ 공자의 글을 이런 곳에 인용해 송구스럽지만, 이번엔 정말 군자스러운(?) 다이어리를 고르고 싶다. 다이어리에 이렇게 목을 맬일인가. 사실 다이어리에 내가 바라는 것은 미래의 나 자신에게 바라는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기필코 바탕과 외관의 균형을 이룬 사람이 되리라. 다이어리를 고르며 이루기 요원한 약속들을 오늘도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