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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리 Dec 06. 2016

태극기의 두 가지 의미

서울역 광장과 청와대 앞에서.

술이 덜 깬 채로 집을 나섰다. 해장은 언제나 전주식 콩나물 국밥 아니면 육개장으로 하는데, 오늘은 육개장으로 결정했다. 콩나물 국밥집까지 걸어가기 너무 귀찮아서. 서울역 근처 동자동, 토요일 이 동네의 거리는 휑하다. 여기 음식점들의 손님은 대부분 근처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이다. 그 대다수는 주말에 출근을 하지 않기에 음식점도 문을 열지 않는다.


썰렁한 거리에서 맛집 한 번 찾아보겠다고 음산한 골목 앞에 섰다. 분위기가 <황해> 뺨친다. 그래도 3년 가까이 이 동네에 살면서 마음에 드는 음식점을 거의 발견하지 못한 억울함에(후암시장에 닭갈비집 한 곳 만이 만족스러웠다.)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발걸음을 뗐다. 골목 안 가게들도 상황은 같았다. 절반 이상은 문을 닫았다. 오늘만이 아니라 아예 폐업한 듯 보이는 곳들도 있었다.

 

그 중 ‘육개장’이 써있는 해장국 집을 발견해 들어갔다. 백열등은 환한데 가게 곳곳에 어둠이 스며들었다고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손님이 아무도 없어서 그런 게 아니다. 거리의 분위기에 식당까지 물들었나보다. 나는 하정우가 된 듯 했다. 그래서 입맛이 딱히 돌지 않음에도 맛깔스럽게 육개장을 먹으리라 다짐했다.

 

육개장을 시키고 기다리는데 노인 세 분이 들어 오신다. 한 분은 손에 태극기를 쥐고 있었다. 서울역, 노인, 태극기 이 세 가지를 조합해 나는 불순한 상상을 했다. 상상은 현실이었다. 그들은 자리에 앉기 무섭게 ‘젊은 놈’들을 욕했다. 젊은 놈들은 다 선동을 당했다느니, 왜 일자리를 국가한테 달라고 요구하냐느니, 고생도 안 해봤다느니, 고생 해 본 자신들만이 진정한 애국자라느니 등등.

  

더 이상 참다가는 육개장이 역류할 것 같아 한 마디 했다.

“아버님 젊은 놈 옆에서 밥 먹고 있으니까 좀.”

그제야 할아버지들은 베트남 전쟁으로 대화를 바꿨다. ‘젊은 놈들 욕’을 직접적으로 안 할 뿐이지 큰 틀에서 보면 딱히 달라진 것 없는 주제다. 그렇게 하정우처럼 먹겠다는 다짐은 잊은 채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육개장을 밀어 넣고 시위에 나섰다.


청와대 앞 100m에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식사 중 만난 노인의 손에 들린 그 것과 같은 물건이다. ‘광화문의 태극기’와 ‘노인의 손에 들린 태극기’ 모두 표면상 ‘애국’을 상징한다는 점까지도 같다. 하지만 둘이 내포하고 있는 공적 코드는 완전히 다르게 해석된다. 광화문의 시민들은 민주공화국의 시스템을 완전히 무시한 대통령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원함으로써 ‘내 나라’를 지키려는 애국을. 노인들은 박정희-박근혜로 이어지는 현대판 왕조가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애국을 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구성원 모두가 ‘시민’으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전제가 우선 확립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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